1968년 “청와대를 까부수러 왔다”는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金新朝) 일당의 '1·21 사태'가 터지고 그 이틀 뒤엔 미 정보 수집함(艦)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나포되자 2월5일 박정희 대통령이 린든 존슨 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행위는 반드시 응징을 받게 된다는 교훈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꿔 말해 단호한 군사적 응징 요구가 편지의 골자였다. 그러나 존슨은 고려할 점이 많다며 신중한 태도였다. 한데 이번 노무현 대통령은 그 때와는 반대로 “제발 군사적 응징만은 말아 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하러 갔으니 이 또한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 할 것인가.

역대 한·미 정상회담의 성격은 한국측의 일방적인 청탁 또는 양해를 구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16 직후인 61년 10월의 박정희·케네디 회담을 가리켜 외국 언론들은 “식민지 총독에 대한 종주국 황제의 면접시험”이라고 폄훼했다.

그 때는 미국이 베트남전을 완전히 떠맡기 전이었다. 그런데도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전의 한국군 파병을 앞질러 제의, 미국의 환심을 샀다. 그런데 69년 8월의 박정희·닉슨 회담만은 굳이 '사지 않은' 환심을 주고받은 자리였다. 한국전과 베트남전의 우의, 굳건한 방위조약, 아폴로 11호에 대한 찬탄, 박정희의 영도 찬양 등.

하지만 93년 11월의 김영삼·클린턴 회담과 2001년 3월의 김대중·부시 회담이 실패한 까닭은 무엇인가. 신중하고도 간절한 부탁과 상의보다는 '정치 9단'의 노련함이 아이를 다루는 듯한, 한 마디로 대미(對美) 설득 쪽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의 외신 평은 냉혹했다. “한·미간 심각한 불화의 위험성을 느낀다”는 게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였고 “조지 부시가 김대중의 뺨을 때린 격”이라는 게 셀리그 해리슨 미국 우드로 윌슨 선임 연구원의 모욕적인 평가였다. 이번 노 대통령의 '포괄적 상호 발전' 주의는 2년 전 김대중이 부시에게 이미 제의했던 바였지만 '포괄'이 문제가 아니다. 북핵 문제만이라도 노 대통령의 제의와 합의대로 평화적으로 해결되느냐가 중요하다. 귀추가 주목된다. /오동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