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에 인파가 몰리고 있다고 한다. 지난 주말까지 전국 300여만명이 관람했고 제작사측은 600만명 동원을 장담하고 있다.

화성 사건에 드리워진 암울한 시대의 그림자를 자연스럽게 화면에 담아낸 감독의 탄탄한 연출력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도 화제다. 양적 팽창에 비해 질적 허기에 주렸던 영화계에 모처럼 등장한 수작(秀作)이라는 평가가 지나치지 않다는 느낌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은 분명 아픈 추억이다. 영화에서 마지막 피해 여학생이 등화관제의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범인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때 관객들은 국민의 등화(燈火)가 관제(管制)당했던 냉전시대의 부조리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국가 자위(自衛)를 위해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동안 한 생명은 죽음의 대롱속으로 빨려들어갔으니 전체주의의 비극인 셈이다. 국제행사와 민주화시위에 공권력이 소모되는 동안 영화속의 경찰들이 빚어내는 각종 촌극과 용의자들에 대한 폭력은 인권과 인격이 유린됐던 시대에 가능했던 우울한 에피소드이자 블랙유머이다.

화성 사건이 미제로 남은 이유는 이처럼 범인이 암약할 수 있었던 당대(當代)의 사정(史情)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엽기적인 연쇄살인범은 많았다. 영국의 '요크셔의 살인마' 피터 셔트클리프는 3년동안 13명의 여자를, 미국의 테드 번디는 16명의 여성을 욕보인 뒤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의 경찰은 이들을 검거했는데, 모두 불심검문의 개가였다. 공권력이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면 반드시 범인을 전기의자에 앉힐 수 있다는 교훈인 셈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 화성시민이나 피해자 유족들은 진저리를 칠 것이다. 5년간 10건의 연쇄살인 수사에 연인원 18만명을 쏟아붓고도 범인 검거에 실패한 경찰도 즐거운 추억일리 없다.

그러나 살인을 추억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범인을 검거해야만 한다. 영화에서 처럼 사건을 어두운 터널속으로 전송(?)할 일이 아니다. 얼마 안남은 공소시효, 경찰이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는 것은 유족은 물론 국민 모두가 궁금해 하는 범인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이다./윤인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