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미연방수사국(FBI) 요원 로버트 필립 헨슨이 이중간첩으로 체포되자 미국은 발칵 뒤집어졌다. 헨슨은 15년 동안 옛 소련과 러시아에 일급정보를 넘기고 140만 달러를 챙겼다.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주 비엔나 주민들은 그런 헨슨을 6명의 자녀를 둔 평범한 가장으로만 알았다. 정보를 사들인 러시아도 그저 암호명 'B'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영국의 상류층 엘리트들이 사회주의를 신봉해 2차세계대전때 소련 스파이를 자청한 '케임브리지 그룹'의 '제5의 사나이'도 첩보세계의 익명(匿名)·익면(匿面)의 윤리(?)를 잘 보여준 인물이다. 5인의 케임브리지 동문 스파이 중 킴 필비, 거이 불게스, 도널드 매클린, 안토니 브런트 등 4명은 신원이 밝혀져 소련으로 망명했으나 남은 1명은 깨끗이 증발해 '제5의 사나이'라는 신비한 별명을 붙여준 것이다. 결국 85년 존 케언크로스가 제5의 사나이로 밝혀졌는데 이미 그의 나이 72세로 영국대외정보부 MI6, 영국 외무부·재무부에 근무하다 74년 은퇴한 노인이었다.

이 뿐 아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일등공신인 이중간첩 가르보는 패전의 멍에를 안긴 독일 나치정권으로부터 철십자훈장을 받을 정도의 철면피였다. 또 2차대전 당시 영국 스파이 두스코 포포프는 종전후 대영제국훈장을 받았는데, 그 장소가 런던 리츠호텔의 바(bar·술집)였다. 이렇듯 첩보세계는 얼굴도 이름도 없이 오직 암호만으로 존재하는 음지의 세상인 것이다. 독일 통일후 서독의 주요인사들이 동독의 첩자로 드러나 '스파이 대란'이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총성없는 전쟁터인 첩보전에서 얼굴 공개는 곧 사망선고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원 간부들과 촬영한 사진이 그대로 인터넷 신문에 게재돼 큰 파문이 일고 있다. 암호로만 존재했을 국정원 핵심 책임자들의 얼굴이 만천하에 공개된 것이다. 그것도 청와대 전속 사진사가 대통령이 호의를 보이는 인터넷 신문에만 몰래 전해주었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얼굴이 공개된 국정원 간부들이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의 국정원 격려 방문이 국정원을 뒤흔든 빌미가 됐으니 딱한 일이다. /윤인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