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독은 신중했다. 동독 공산당 서기장 울브리히트가 서독 하이네만 대통령에게 정상회담 제의 서한을 보낸 것은 69년 12월17일이었다. 그러나 답장은 즉각 보내지 않았고 브란트 서독 총리가 슈토프 동독 총리에게 만나자는 역제의 답장을 보낸 것은 그 한 달 뒤인 70년 1월22일이었다.

슈토프는 맞장구를 쳤고 한 달 뒤인 2월 19일이나 26일쯤 만나자고 했다. 그 역시 전화가 아닌 편지였다. 하지만 브란트는 연방 각료회의 검토와 미·영·불과의 협의를 거쳐야 한다며 제의 날짜 한 달 후인 3월 중순 이후로 하자고 했고 그런 신중한 절차를 거쳐 분단 21년만의 역사적인 첫 동·서독 정상회담은 70년 3월19일 동독 에어푸르트에서 열렸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고 20년간 9차례 정상회담 끝에 드디어 통일의 위업을 이뤘다. 심복을 통해 쥐도 새도 모르게 방수복(防水服)도 안 입힌 채 '물밑 접촉'을 벌이게 하지도 않았고 당당하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타진하고 진행했다. 또 7월 장마 젖은 하늘에 번개 치듯 정상회담 날짜를 '전격(電擊)' 발표하지도 않았다.

김일성이 사망한 그 해 94년 방북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간접적으로 제의하는 식도 물론 아니었다. 더구나 정상회담 대가로 10억달러를 요구, 결국 1억달러를 주었느니 5억달러를 어쨌느니 하는 얘기도 듣지 못했고 송금이 늦어 회담 날짜가 연기됐다는 전설도 들은 바 없다. 2차 회담도 약속대로 3개월 후에 열렸다.

김일성의 첫 제의야 이뤄지지 않았으니까 성사된 회담을 먼저 제의한 쪽은 남쪽이지만 독일은 동독이 먼저였다. 다만 첫 정상회담 장소가 '동'과 '북'이었다는 점만이 같을 뿐이다. 궁금한 건 94년 그 해 김일성이 생존, YS와 정상회담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도 그런 어마어마한 '면회료' 청구서를 사전에 내밀었고 약속을 파기, 답방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YS만은 “기런 거액이라 카더라도 장차 갱제 교류가 이뤄지면 가능할끼 아입니까”해가며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단 1달러도 주지 않았다던 1달러가 1억달러의 몇 분의 1이 맞느냐는 셈법은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 것인가./오동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