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다.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은 고려인 가이드는 구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사회의 혼란상을 '1불 공화국'으로 표현했다. 호텔과 음식점에서의 팁은 물론이거니와 거리에서 경찰과 문제가 생겨도 1달러면 만사형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1달러는 마치 소련 공산주의를 무너뜨린 자본주의의 힘을 보여주려는 듯 곳곳에서 신통방통한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세관 마저도 1달러에 점령당한 장면은 충격이었다. 1달러를 머릿수 만큼 거두어주거나, 여행가방에 슬쩍 끼워두면 모든 사람과 물건이 무사통과였다. 부도난 사회주의에서 싹튼 공무원들의 비리는 그 이후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한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반복해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면 자본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공무원들은 비리에서 비켜서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자신있게 'Yes'를 외칠 수 있는 우리가 아니다. 더욱 큰 일은 공무원들이 비리와 독직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범죄 환경이 점점 구조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금융감독원 자료에 의하면 공무원·교사·국영기업체·군인·은행원 4만6천여명이 금융 신용불량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중 공무원은 2만1천명이 넘어 100명 중 4명의 공무원이 신용불량의 딱지를 붙이고 근무중이다. 국영기업체 직원 1만3천700여명, 은행원 8천명, 군인 3천명 가까이가 은행으로 부터 빚 독촉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신용 상실이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인 경제체제에서 호랑이 보다 무서운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공무원과 은행원, 군인, 교사가 득실거리고 있다니….

은행빚에 몰려 민원인의 청탁과 학부모의 촌지를 거절못하는 공무원과 교사, 눈앞에 오락가락하는 현금다발에 심란한 은행원, 국방 보다도 목전의 채무상환이 다급한 군인들을 상상하면 정말 끔찍하다. 얼마전 형사가 사람을 납치한 일도 우연이 아닌 듯 싶어 더 그렇다. 카드빚으로 인한 각종 범죄가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를 지켜 줄 파수꾼들 마저 아슬아슬한 환경에 처해 있으니, 신용대란의 막판이 어디까지 치달을지 몰라 이래저래 국민만 불안한 시절이다. /윤인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