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도 명당(明堂水)이 있다. 조선 태종 6년(1406년) 600명의 인부를 동원, 인공으로 뚫은 개천이지만 서울의 청계천이 명당수로 꼽히는 까닭이 있다. '한경지략(漢京識略)' 개천(開川) 조(條)의 기록처럼 조선 땅의 모든 강물이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반해 서울의 개천(開川)만은 동쪽으로 흐르기 때문이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언급처럼 백악(白嶽→北岳), 인왕, 목멱(남산) 등 산골짜기 물이 모두 동으로 합쳐 흘러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개천'이 곧 청계천이다. 조선 초기 왕조실록 등 모든 기록에 '開川'이라 했듯이 청계천의 옛 이름은 '개천'이었고 영조 이후에 청계천으로 개칭됐다는 것이다.

'이 곳 방산(芳山)은 개천과 더불어 장안 사람들의 뜨락으로 각광을 받았다. 물 빠진 개천 바닥은 돌팔매싸움, 편싸움 터로 이용되었고 낮에는 한길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아낙네들 수십, 수백명이 실버들 늘어진 개울가에서 연두색 장옷을 쓴 채 부지런히 빨랫방망이를 내리쳤고 개천 석축 가에는 오색 빨래가 널렸다'(漢京識略 都城 條)는 그 청계천을 보전하려는 선현들의 노력도 대단했다.

집현전 수찬 이선로(李善老)가 세종께 주청했고 교리 어효첨(魚孝瞻)은 “명당수가 더러우면 패역흉잔(悖逆凶殘)의 징조이며 신령(神靈)이 불안한지라…” 더럽혀선 안된다며 세종 앞에서 일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훗날 유득공(柳得恭)과 이덕무가 주고받은 청계천 화답 시(和韻) 또한 유명하다.

정월 대보름 휘영청 달빛 속의 다리밟기(踏橋)는 어떻고 대광통교(大廣通橋), 장통교(長通橋), 수표교(水標橋), 영풍교(永豊橋), 태평교(太平橋), 영도교(永渡橋) 등 정겨운 다리 이름은 어떤가. 동대문 남쪽 성벽 밑엔 다섯 개의 아치형 구멍이 나란히 연결된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었고 임꺽정이 수달처럼 도성을 빠져 드나들던 비상문이 바로 그 문이었다.

그런 600년 명당수 청계천을 콘크리트로 뒤덮어버린 것은 무지막지한 개발 논리의 폭거였다. 교통난, 주변 상권 등 당장의 문제도 없지 않지만 청계천이 복원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동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