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죽여 인(仁)을 이루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은 인간이 발현할 수 있는 이타심의 최고 경지다. 이때 살신 보시(布施)의 대상은 국가와 민족, 이웃 등 이해관계를 초월한 순수한 집단이나 개인이어야 한다. 대가나 이해가 얽혀서야 '살신'의 빛이 바래고 '성인'도 어렵기 때문이다. 살신성인을 성취한 의인들이 각박한 인간세상을 밝혀주는 등불로 영원히 빛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년전 동경 신오쿠보(新大久保) 전철역에서 선로에 추락한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이수현씨의 살신성인은 국가간의 반목까지도 녹여내는 기적을 만들었다. 당시는 일본 지도층의 잇단 군국주의적 망언으로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한국의 젊은 유학생 이씨의 이타적 살신은 현해탄 양쪽의 국민을 인간애로 소통시키는 장중한 휴먼드라마를 연출했고, 양국민 모두 서로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권력과 재력의 주구(走狗)로 살신한 경우 한낱 개죽음으로 폄훼되지만 개의 죽음에도 구분이 있다. 온몸에 강물을 적셔 술취한 주인을 불길에서 구하고 의구총(義狗塚)을 남긴 조선 인조 시절 선산의 한 견공(犬公)이나, 고려 고종때 간행된 보한집(補閑集)에 같은 내용으로 등장하는 오수(獒樹)의 의견(義犬)은 살신으로 '사람이 되는(成人)' 경지에 오른 동물들이다. 이렇듯 사람 아닌 짐승들도 대의를 행하면 인간세상에 감동과 교화의 빛을 비추건만, 우리 주변은 지금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우글대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요 며칠 우리 사회에 사람 살 맛 나는 훈기가 감돌고 있다. 지난 25일 달려오는 새마을호 열차에 뛰어들어 어린 아이를 구하고 중상을 입은 역무원 김행균씨의 의행이 빚어낸 감동 때문이다. 잘려나간 자신의 발목 보다는 밀쳐낸 아이의 안부를 먼저 챙겼다는 김씨를 생각하면 아무나 살신성인의 반열에 오르는게 아니지 싶어 부끄러움이 앞선다. 천만다행 김씨가 살신을 모면했고 두 다리도 잘 치료가 됐다니 미안한 마음을 조금 덜었을 뿐이다.

살신성인의 살아있는 귀감으로 오래도록 우리 사회의 빛이 되어주길 바란다. 그나저나 민망한 사정은 이해하나, 아이의 부모가 더 늦기전에 김씨와 해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완벽한 해피엔딩일 텐데…./윤인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