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질식하고 있다. 내가 들어갈 길을 트려고 땀을 흘리고 있다. 나는 산 채로 묻힐 염려가 없다'. 어느 시인의 유서(遺書) 같지만 시인은 시인이로되 피아노의 시인인 쇼팽의 유서다.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건 버나드 쇼가 자신의 묘비명으로 써 달라는 유서다.

전자가 시적(詩的)인 로망을 띠고 있다면 후자는 묘지까지 끌고 갈 익살이다. 그러나 유서는 엄숙하고도 지엄하다. 유산 분배 유서가 아니더라도 칸트의 말처럼 '가장 불행한 생애의 기록이자 가장 효력 있는 기록'이기 때문이고 이승과 저승을 잇는 절박한 결어(結語)이기 때문이다.

한데 요즘 말로 좀 '썰렁'한 유서도 있다. '①개혁·개방노선은 바뀌어서는 안된다 ②군(軍)에 대한 당의 지도를 견지하라' 등 중국 공산당 정치국에 전달한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이른바 '정치 유서 12조(條)'가 그것이고 '덩(鄧)은 허풍선이 왕초다. 마오(毛澤東)를 배반하다니! 곱게 죽지 못할 것'이라고 한 장칭(江靑)의 유서다.

'아내에게 좋은 침대를 물려준다'는 셰익스피어의 유서 역시 좀 그렇다. '살아 있는 유서(living will)'라는 것도 있다.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재클린 케네디가 죽기 몇 달 전인 1994년 2월 '모든 투약을 끊고 집으로 돌아가 임종을 맞겠다'며 병원 문서에 서명했던 것처럼 의사에게 미리 요청해 두는 '각서 유서'가 즉 '살아 있는 유서'다.

88년 4월 빌딩에서 투신한 범양상선 박모 회장의 '인간이 되시오'처럼 유행어가 돼버린 유서도 있고 '모든 판검사를 죽이고 싶다'는 어느 탈주범의 유서(그 해 10월)도 있었다. 가장 멋있는 유서의 주인공이라면 “나 오늘 갈란다. 무(無)라 무라…”라고 한 세칭 판사승(判事僧) 효봉(曉峰)스님일지 모른다.

김윤규 사장에게 '당신 너무 자주 하는 윙크 버릇을 고치십시오'라고 쓴 이번 정몽헌 회장의 농담 같은 유서도 여유가 넘친다. 그런데 저승길이 뭐 그리도 급해 그런 난필로 쫓기듯 휘갈겼던가. 그리고 '유분(뼛가루?)을 금강산에 뿌려 달라'고 했는데 선산에 매장한다는 건 유서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다. /오동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