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것이 적은 자는 백로를 들어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들어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아, 저 까마귀를 보건대 그 날개보다 더 검은빛도 없건만, 언뜻 비치면 엷은 황색도 되고 햇빛에서는 자줏빛으로 번쩍이다가 눈이 아물거리면 비취색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푸른 까마귀라 일컬어도 좋고 붉은 까마귀라 해도 좋을 것이다. 물체에는 원래 일정한 빛깔이 없거늘…'. 연암(燕巖) 박지원은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에서 이렇게 썼다.
색깔의 고정관념에 대한 번뜩이는 상상력의 날개가 아닐 수 없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도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고 했다. 그럼 태양 속의 세 발 달린 상상의 새 금오(golden crow)는 검은 까마귀인가 붉은 까마귀인가.
백조(白鳥)라면 글자 그대로 하얀 새지만 호주 멜버른의 식물원엔 검은 백조도 있다. 이른바 알비노(albino)현상, 백화(白化)현상에 의한 피부 색소의 돌연변이로 생긴다는 하얀 까치와 하얀 제비도 있다. 전자는 1989년 6월 충북 영동에서, 후자는 같은 해 8월 서울 응암동에서 발견됐다. 배화교(拜火敎) 원시인이 섬긴 불의 고유색은 붉다.
그러나 요즘엔 새파란 가스불도 있고 촛불시위에 등장하는 노란 듯 하얀 촛불도 있다. 숯도 까망이 본색이지만 백탄(白炭)이라는 것도 있고 황금색의 황금이 아닌 백금이 있는가 하면 붉은 피가 아닌 백혈병도 있다. 여성용 입술 루주(rouge)는 프랑스어로 빨간 색을 뜻한다. 그렇다면 노란 루주, 갈색 루주, 보랏빛 루주라는 말은 엉터리 반어(反語)가 돼버린다.
요즘엔 작물과 제조업의 색깔혁명으로 까만 수박과 노란 콜라, 검정 두부, 붉은 밀가루 등이 정신이 아뜩할 정도로 쏟아진다. 이념의 색깔 또한 몹시 헷갈린다. 우리 정부 조직체와 정당, 사회 단체만 해도 상당수가 불그죽죽 물들어 있는 듯 싶은데도 색깔을 논하자면 그게 아니라고 잡아뗀다.
미군부대 장갑차를 기습, 점거한 한총련의 색깔도 마찬가지다. 본인들이야 순수한 열정이라지만 겉보기에 분명한 이적 행위라면 색깔부터 오해받기 십상이다. 광선에 따라 녹색 또는 자줏빛으로 변하는 '비단벌레 색깔'이야말로 경계할 일이다./오동환(논설위원)
한총련의 색깔
입력 2003-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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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1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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