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6월 전국이 불가마속에 든 듯 가뭄이 한창일 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비만 온다면 기우제를 지내고 싶다”고 안타까운 심경을 피력한 바 있다. 김 전대통령의 기우제는 '비과학적 대통령'이라는 얘기가 나올까봐 불발됐지만, 지금 노무현 대통령은 기청제(祈晴祭)라도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듯 하다. 입추가 지난지 한달이 넘고 내일모레 추석인데도 일기예보는 연일 비소식 일색이다. 벼농사를 망친 농민들은 논에 불을 지르고 과수농가들은 과일에 단물이 빠져 난리다.

사실 벼농사에 의존해온 우리 선조들은 비가 안와도 걱정, 와도 걱정이었다. 벼를 키울 때는 비를 바라는 기우제를, 알곡이 영글어야 할 때는 햇볕을 바라는 기청제를 올려야 했으니 나라가 온통 하늘만 바라보는 형국일 밖에. 현대인에게 생소한 기청제는 입추가 지나도록 장마가 계속되면 어김없이 행해졌다. 태종조 18년간은 한해를 제외하곤 해마다 기우제와 기청제를 지냈을 정도였다.

기우제 때는 남문인 숭례문(崇禮門)을 닫아 양기를 막았고 기청제 때는 북문인 숙청문(肅淸門)을 닫아 음기를 막았다. 고려 태조의 할머니 용녀(龍女)가 팠다는 개성대정(開城大井)은 기청제를 드리는 성소(聖所)로 유명했다. 우리 뿐 아니다. 중국에서는 비가 너무 내리면 우사(雨師·rainmaker)인 용왕(龍王)을 감금하고 협박까지 한다.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내리쬐는 하루 땡볕에 쌀 12만섬이 증산된다고 한다. 또 백로와 추석 사이의 짱짱한 가을햇살에 단물이 듬뿍 드는 과일로 포도가 있다. 선조들은 이 시기에 편지를 쓸 때면 으레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만강하옵시고'로 시작했는데 올 가을엔 택도 없는 소리가 됐다. 기청제라도 올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은 이유다. 그래도 추석은 온 가족이 모이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다. 힘든 세상살이 잠시 잊고 따스한 정과 희망을 나누어 가질 일이다./윤인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