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으로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기 시작한 것은 고종 18년(1881)부터다. 1881년 1월 교육 군사 공업 등 여러 방면을 시찰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한 신사유람단이 그들이다. 이 시찰단의 규모는 조사(朝士·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 12명을 정식 위원으로 하고 그 아래 각각 보조원으로 수원(隨員·외교사절 수행원) 2명 이상과 통사(通事·번역담당)와 종인(從人) 각각 1명씩을 대동케 하여 평균 5명을 1반으로 하는 총인원 62명이었다. 이들은 70여일간 일본에 머물면서 동경을 비롯한 대판(大阪) 등지를 시찰하고 돌아와 우리의 제도개편과 시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들 사행 중 어윤중(魚允中) 아래 수원(隨員)으로 갔던 유길준(兪吉濬) 윤치호(尹致昊) 유정수(柳定秀) 등은 그대로 일본에 유학생으로 남아 수학을 계속하기도 했다. 유길준은 2년뒤인 188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우리나라 서양유학생 1호를 기록하기도 한다. 같은해 9월엔 김윤식(金允植)을 영선사(領選使)로 삼아 그 아래 유학생 68명을 청(淸)에 파견, 신식무기의 제조 및 사용법을 습득토록 했다.
가장 큰 규모의 유학생 파견은 1895년에 이루어졌다. 이 해 개화파 내각은 150여명에 달하는 관비유학생을 일본에 파견하여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입학시켰다. 이 숫자는 당시 조선의 실정으로 볼 때 엄청난 규모의 유학생 파견이다. 우리나라가 관비(官費)가 아닌 해외유학생을 정식으로 보내기 시작한 것은 1948년부터였다. 1950년까지 유학생은 303명이었고, 그 가운데 90%이상인 284명이 미국에 갔다.
올해 우리나라 유학생이 15만9천903명으로 사상최대를 기록했다. 50여년만에 500배가량 늘어난 것이다. 격세지감(隔世之感) 그 자체다. 반면 국내 외국인 유학생은 1만2천314명이며 유학수지적자도 15억3천만달러라고 한다. 그러나 이중 실제로 국익에 도움이 되는 유학은 얼마나 될까. 유학생중 대학정규과정 수강생은 61.5%고 나머지는 어학연수라고 하니 말이다. /鄭俊晟(논설위원)
유학생(留學生)
입력 2003-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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