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다사다난했던 계미년 한 해가 그 긴 꼬리를 서서히 감추려 한다. 새해 벽두에 세운 계획과 각오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세월만 허비한 듯한 회한이 가슴을 저미지만 그래도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의 굴레 속에서 또다시 희망찬 새해를 다짐하게 된다. 예로부터 송구영신의 의식은 섣달 그믐날 밤 온 가족들이 모여 한 해를 반성하고 다가오는 1년에 대한 구상과 결의로 이어지면서 가족들의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계기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되면서 연말모임도 많은 변화를 거듭하여 왔다. 특히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한 정신문화의 상대적 위축은 이러한 송구영신 본래의 의미마저 퇴색시켜 안타까움을 더해주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길거리로 떼지어 나온 젊은이들의 송년회 문화의 출발은 학생들의 극심한 반대 속에 한일협정이 체결됐던 64년 12월 당시 도봉산 우이동 계곡 등지에서 밤을 지샌 남녀 중고생 3천여명이 동틀녘에 내려온 사건이었고 이날 종로 명동으로 쏟아져나온 인파만 무려 35만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전시 인구와 맞먹는 이들은 필름을 감아만든 뿔피리를 불며 서울시내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신문 사회면 톱을 장식했다.

유신시대로 통했던 70년대는 '망년회 고속족'이 등장해 교외나 온천 등지로 원정을 떠나는 이들이 늘어났다. 또는 다방이나 제과점을 빌려 '트위스트'를 추고 고고장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12·12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학생운동이 본격화했던 80년대는 70년대의 고고장 대신 디스코텍으로 몰려갔고, '연말 쫑파티'에서 시대를 풍자하는 게임과 유머가 유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신세대들의 시대로 통하는 90년대에는 서구식 파티문화에 젖어들게 된다.

최근에는 장기불황으로 예년과 달리 소규모 모임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점심 송년모임이나 연회장소 대신 집에서 모임을 갖는 알뜰족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봉사활동으로 송년모임을 대신하기도 한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한해를 정리하면서 새해설계도 하고, 멀어졌던 이웃과 친지들의 안부를 살피는 마음의 여유도 가져야 할 것이다. /李俊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