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친인척비리'가 터져나올 때마다 들먹여지는 게 조선시대 '분경금지법'이다. 분경이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줄임말로, 벼슬을 따기 위해 권력자의 집에 드나들며 엽관운동을 하는 행위를 말한다. 분경은 고려시대에도 문제가 되었다는 고려사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유서깊은(?) 민족의 고질이다. 그러나 법으로 분경금지를 규정한 것은 조선왕조 들어서다. 정종이 정권안정 차원에서 대소관리가 사적으로 만나는 일(사알)을 금지하는 교지를 처음으로 내렸다. 이후 태종이 강력히 시행했고, 성종 때 경국대전에 명문화했다. 골자는 왕족과 고급관리의 집에 친척이나 가까운 이웃이 아니면서 출입한 자는 분경자로 간주해서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는 곤장 100대에 3천리 밖으로 유배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 당시 엽관운동이 이같은 극형을 필요로 할만큼 극성을 부렸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분경금지법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왕족, 그 가운데서도 외척과 왕비족 견제에는 한계가 있었다. 조선후기의 역사가 외척정치, 세도정치로 흐른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숙종조에 들어 분경금지의 범위를 현실적으로 축소 정비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역시 유명무실해졌다. 급기야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통탄하듯이 고종대에 오면 왕실이 직접 벼슬을 팔아먹을 정도로 타락했고, 조선왕조는 결국 망했다.
 
대통령의 형에게 사장 연임을 부탁하며 3천만원을 주었던 전 대우건설 사장이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그의 실명을 거론하며 이젠 제발 소용없는 청탁은 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한 직후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에 남사장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목숨을 끊었는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그의 투신이 탄핵정국의 피니시 블로로 작용했다는 견해가 많다. 대통령의 형은 불구속 기소되었을 뿐이다. 21세기에도 왕조시대의 부정적 유산을 말끔히 청산하지 못해 발생한 비극 앞에서 한없이 우울하다. /楊勳道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