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지역 기미년 만세운동은 자발성이 두드러진다. 첫 시위는 3월11일에 있었다. 누가 조직한 것도 지도한 것도 아니다. 서울 소식만으로 읍내 상인이 철시하고 참가했다. 3월말까지는 안성 여러 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졌다. '만세를 어떻게 부르는 것인지 몰라 물어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증언에서 당시 안성인들의 열의와 자발성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응집력 또한 대단해서 원곡·양성에서 4월1일 결정적 봉기가 이뤄질 무렵엔 2천명이 자연스럽게 만세 물결을 이루었다. 주재소와 우편국, 일본 상점을 모조리 뒤엎고 이틀 동안 해방구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몇몇 앞장선 이는 있었으나 이때도 뚜렷한 지도부는 없었다.
 
안성은 원래 항쟁의 고장이다.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왕실은 안동으로 도망갔고 홍건적은 별 저항없이 내륙 깊숙이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러나 안성사람들만은 이들에게 거짓 항복하고 주연을 베푼 다음 술에 취한 홍건적 장수의 목을 여섯이나 베었다. 이 공으로 안성은 현에서 군으로 격상되었다. 임진왜란 때도 홍자수 홍계남 이덕남 등 의병장이 활약하여 안성을 지켜냈다. 조선시대 안성장은 전국 3대 시장 가운데 하나였다. 삼남대로의 길목인 안성장은 서울의 시장보다 두세가지가 더 난다고 할만큼 번성했다. 일제시대에도 조선팔도에서 일본 상인이 뿌리내리지 못한 유일한 지역이 안성이었다고 한다. 장터의 삶은 곧 민중의 삶이다. 4·1만세운동은 건강한 민중성과 남다른 자부심이 결합하여 표출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200명이 죽고 410명이 다치고 425명이 체포되었지만 좋은 세상을 바라는 안성인들의 꿈은 꺾이지 않았다.
 
4·1만세운동이 재현된다고 한다. 가을 바우덕이 축제와 더불어 안성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자주성을 확인하고 계승하는 행사로 자리잡아 나가기를 빈다. /楊勳道(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