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고학자들이 북부 간쑤(甘肅)성의 전한(前漢) 문제(文帝→BC177~141) 무덤에서 2천100여 년 전의 종이 지도 조각을 발견했다고 보도한 건 1989년 8월 2일자 광명일보(光明日報)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종이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후한(後漢) 때의 채윤(蔡倫)이었고 그때가 AD105년이라는 게 역사적 통설이다. 2세기 초였다. 일본에선 4~5세기에 종이를 처음 만들었고 8세기가 돼서야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양질의 종이가 생산됐다. 그러니까 화장실 뒤 처리 용으로 종이 혜택을 본 최초의 미인은 8세기 중반(756년)에 죽은 양귀비가 아닐지 모른다. 기원 전 202년 천하장사 항우를 따라 자살한 절세미인 우미인(虞美人)이나 역시 기원전의 경국지색(傾國之色) 서시(西施) 등은 구경조차 못했을 게 종이였다.

설령 종이가 있었다 해도 14세기까진 귀중품이었다. 코를 풀거나 화장실 뒤 처리용 종이가 보급된 건 근대에 들어서면서였다. 그렇다면 양귀비는 물론 신라의 여왕과 공주들, 그 무렵의 일본 왕족들도 화장실 종이 혜택은 상상치도 못했을지 모른다. 그럼 어떻게 뒤 처리를 했을까. 중동이나 남아시아처럼 왼손을 쓰고 물로 닦는 방법이 아니라 중국에서는 최근까지도 나뭇조각을 깎아 두고 거듭 사용했고 비슷한 방법을 그리스나 일본서도 차용(借用)했다. 아니, 9~10세기까지는 화장실 자체가 없었다. 귀족들의 주택도 예외가 아니었다. 방안의 변기를 오줌 요(尿)자 ‘요강’만이 아니라 ‘분(糞)강’으로도 썼던 것이다. 중국→한국의 그 요강, 분강은 그대로 일본에도 전해졌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뒷간에 짚단을 매달아 두고 지푸라기를 뽑아 쓰던 한국인에게 그 후 보급된 두루마리 휴지는 하늘이 내린 복덩이였다. 하루 16만이 이용하는 인천 지하철 화장실에 화장지―휴지가 없다는 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각 비치하길 바란다.
/吳東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