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나부낀다. 그것은 더이상 '소리없는 아우성'이 아니다. 마음의 지축을 흔드는 함성이다. '한열이를 살려내라'. 87년 여름 연세대 학생회관 외벽에 걸렸던 걸개그림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한열은 피를 흘렸다. 수많은 대학생과 시민이 출렁이는 그림에 감전되었다. 최병수의 원작 판화를 연세대 동아리 '만화사랑'이 다시 그려낸 이 걸개그림은 6월항쟁의 도화선이자 상징이었다.

미술평론가 라원식에 따르면, '걸개그림'이라는 이름은 미술동인 '두렁'이 지었다. 민족의 미감, 미의식, 미형식을 체득해 나가던 '두렁'은 전통 괘화(掛畵)에 주목했다. 무속 굿판의 신장도(神將圖), 풍물굿판에서 일렁이는 용·호랑이그림, 대중법회 한 가운데 솟아있는 괘불화(掛佛畵) 등을 새롭게 살려낼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첫 걸개그림은 82년 5·22시위 때 서울대 정문 꼭대기에 내걸린 '김상진 열사도'(주필·김봉준)다. 이듬해 '두렁'패는 '땅의 사람들과 사람의 아들(민중과 예수)'이라는 5폭 괘화를 공동창작했다. 이후 걸개그림은 시위와 집회현장을 달구는 미술의 선봉이 되었다. '활화산', '엉겅퀴', '둥지' 등 걸개그림 전문 그림패도 생겨나고 주목할만한 작품도 많이 그려졌다. 하지만 '한열이…'를 정점으로 6월항쟁의 열기가 식으면서 걸개그림도 서서히 퇴조했다. 90년대 들어 걸개그림은 운동권의 표상으로 남거나 백화점의 상업주의에 포획되는 양극화의 길을 걸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회가 3·1절을 맞아 의미있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시민과 함께 그리는 국내 최초·최대 대형 태극기 걸개그림을 그려 부천시청 북측 벽면을 뒤덮겠다는 발상이다. 박제화된 3·1절 기념식을 넘어선다는 점도 신선하고, 함께 만들고 함께 보며 함께 마음의 함성을 지르는 걸개그림의 본뜻을 살린다는 점도 반갑다. 시민들의 호응이 뜨겁다니 더더욱 기대된다.

/楊 勳 道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