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전성시대의 함정
날은 바짝 가물었는데 브라운관 속 역사 드라마는 홍수가 졌다. 바야흐
로 사극 전성시대다. 금요일만 빼고 매일밤 TV를 켜면 사극이다. 주말엔
KBS1 '태조 왕건', 월·화는 SBS '여인천하'와 MBC '홍국영'이 아예 맞불이
고, 수·목요일엔 KBS2 '명성황후'가 시청자를 기다린다. 인기도 그만이
다. '홍국영'은 좀 처지지만 '태조 왕건', '여인천하'는 상한가다. 웬만한
신세대 트렌디 드라마는 발 벗고 뛰어도 쫓아오지 못할 정도다. '명성황
후'도 타이틀역에 이미연이 등장하면서 시청률이 급상승 하기 시작했다 한
다.
(시청자의 구미에 맞는다면)
사극 열풍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태조 왕건'이 끝나면
'제국의 아침'이, '홍국영' 후속으로는 '상도'가 기다리고 있다. 사극도 '
장사'가 된다는 얘기다. 다시말해 사극의 시청자층이 옛날 얘기 좋아하는
일부에서 남녀노소 사방으로 넓어졌다는 의미다. 이미 '용의 눈물', '허
준'이 훌륭하게 입증해준 바 있다. 'TV의 신(神) 시청률'이라면 끔벅죽는
방송사들이 이 점을 놓칠 리 없다. 그들은 시청자들이 원하는 한 얼마든지
역사 드라마를 공급할 용의가 있다.
사극은 대중들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과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제법 깊이
있는 역사인식이나 역사의식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 막강한 전파의 힘을 빌려 전해지는 역사의 이미지는 강력한 영향력
을 발휘한다. 어떤 역사교육보다도 효과가 크다. 간혹 극중 내용이 사실(史
實)과 다르다는 시비가 벌어지는 것도 사실은 바로 이 때문이다. 국민들에
게, 특히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지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는 우려다.
하지만 사극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 드라마'일 뿐이다. 역사에 충실하면
드라마가 딱딱하게 굳는다. 시청자들이 외면한다. 따라서 사실을 어느 정
도 변형·가공·창작 하더라도 드라마를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방송
작가와 연출자들의 일리있는 항변이다
게다가 이제는 감시의 눈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역사기록과 조금만 다를
라 치면 숱한 전문가들이 가차없이 꼬집는다. 궁예는 결코 은부의 손에 죽
지 않았고,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오빠가 아니라 동생이다. 궁중법도나 복식
에 관한 작은 잘못도 날카롭게 비판 받는다. 어쩌면 드라마가 이런 논란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국민의 역사지식 증대에 기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진정한 문제는 사극이 유행하는 배경에 있는 게 아닐까. 현재 방
영중인 드라마들의 시대배경을 다시 들여다 보자. '태조 왕건', 한 왕조가
새로 열리던 통일신라말에서 고려건국기, '여인천하', 조광조의 개혁 회오
리가 몰아치던 조선 중종기, '홍국영', 조선 르네상스의 시작 영조 연간, '
명성황후', 왕조의 흥망이 가물거리던 풍운의 세월. 하나같이 정치적 격변
기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역사의 외피(外皮)를 입었을지 언정 정치와 개
혁에 대해 뭔가 에둘러 할 말이 많다는 의미 아닌가.
(철학이 없는 역사가 문제다)
역사를 되돌아 봐야 하는 시기는 결코 행복한 시절이 아니라고 했다. 역
사에 의탁해 들려주는 메시지는 그만큼 간절하게 다가온다. 지금 여기의 현
실에 대해 직설적으로 얘기하기엔 뭔가 포개진, 안타까운 의미가 짙게 깔리
는 것이다. 중종이 조광조를 제거하라는 밀지를 내린데 대해 난정(강수연)
이 문정왕후(전인화)에게 던지는 대사는 500년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이
군주의 두 얼굴이요, 정치의 본래 모습이라고 이 년은 믿습니다.”
한편 사극은 넘쳐나는데 역사교육은 후퇴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한
때는 지나칠만큼 '국정 국사'를 강조하더니, 이제는 7차교육과정이라며 역
사시간을 줄이고 근·현대사를 선택과목으로 돌린 나라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파동과 이런 상황은 어떤 함수관계일까. '테크노폴리'의 저자 닐 포스
트먼의 말마따나, 사극 전성시대가 문제가 아니라 여러 '역사 이야기들'의
사관의 차이를 제대로 가르칠 여건이 안되는 현실이 문제다. <양훈도(논설>
위원)>양훈도(논설>
史劇 전성시대의 함정
입력 2001-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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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13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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