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몇몇 신문에 보도된 외로운 할머니의 사망기사가 지금도 잊혀지
지 않는다. 강원도 동해시에 살던 김선봉할머니(75)는 피붙이 하나없이 생
활보호대상자로 외롭게 살아왔다. 할머니는 별세하기 전 동해시를 방문해
500만원이 든 적금통장을 내놓고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을 위
해 써달라”고 했다.
 이 돈은 할머니가 풀빵장사와 채소행상으로 어렵게 모은 것이다. 할머니
는 평소 “국가의 지원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으니 나도 이웃을 돕는 것으
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할머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
은 국가적 혜택과 사회적 지원을 받아 성공한 인사들도 이처럼 '신세갚
음'을 한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흔히 우리사회는 나눔에 인색하고 기부문화가 발전하지 못했다고들 한
다. 실제로 기부문화가 정착된 구미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이런 소리를 들을
만하다. 그러나 우리의 기부문화도 발전할 가능성을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올들어 신문에 보도된 거액기부자들의 미담기사를 보면 대부분 이
름없는 시민들의 이야기가 많다.
 70대 할머니가 25억원 상당의 땅을 남편과 아들이 나온 대학에 기증하라
는 유언을 남기고 숨지자 자손들이 이를 그대로 따랐다. 30년간 미장원을
운영하며 모은 10억원의 전재산을 불우이웃을 돕는데 써달라고 적십자사에
기증하고 별세한 할머니도 있다. 연말이면 서울 명동입구의 구세군 자선냄
비에 100만원짜리 돈뭉치를 넣는 '얼굴없는 천사'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지
난 85년부터 해마다 거르지 않고 큰돈을 넣고가는 주인공의 신원은 아직 밝
혀지지 않았다.
 KBS1TV가 주말에 생방송으로 보여주는 '사랑의 리퀘스트'를 보면 우리사
회의 훈훈한 인정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나는 이 프로를 가끔 시청할 때
마다 화면에 ARS 전화통화에 따라 성금의 총액 숫자가 쉴새없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감탄하곤 했다. ARS 전화 한통화로 1천원의 성금이 자동납
부되는데 이렇게 모이는 기부금이 1회 방송당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보통 1
억원을 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시청자들 중에 매회 수만명 이상이 성금
기부전화를 걸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우리날에는 많은 자선·구호단체들이 국민의 성금이나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고 있다. 국민들의 성금이 없다면 단체의 존립이 어려운 경우도 많
을 것이다. 이렇게 말없이, 드러내지 않고 남을 돕고 고통받는 이웃에게 사
랑의 손길을 뻗는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사회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희망
이라는 나무를 심고 가꾸는 아름다운 국민들이다.
 최근 몇년 사이에 해외이민을 가는 사람들 중에는 이민가는 이유로 '한국
의 장래가 불투명하다'거나 '자녀들의 교육문제로' 또는 '자식들을 안심하
고 키울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조국을 떠난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고 한다.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장래에 희망이 없다는 얘기다. 며칠후면 '6
·25'가 된다. 6·25동란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50년이 지나면서 희미해졌
지만 동족 상잔(相殘)의 참화를 직접 겪고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
들이 적지않다.
 분단의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오늘날 한국의 발전상은 누구도
부인 못하는 현실이다. 특히 60대이상의 '6·25세대'들에게는 그야말로 격
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변화다. 아직 선진국이 되려면 먼 길을 더 가야 하지
만 희망을 가꾸는 국민들이 더 늘어난다면 대한민국의 장래는 밝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번역·출간된 프레데릭 불레스텍스 교수(한국외대 불어과)
의 저서인 '착한 미개인·동양의 현자'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13세기초 유럽에서 처음으로 한국을 언급할 때 한국을 '솔랑기
(Solangi)'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고 한다. '솔랑기'는 당시 만주어로 '무
지개'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런 이름이 붙은 배경을 이 책은 밝히지 않고
있지만 그옛날 알려지지않은 극동의 작은 나라를 이상향(理想鄕)으로 생각
했던 것은 아닌지 상상을 해 본다. <具健書(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