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을 다룬 문학작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윤흥길의 '장마'
도입부분은 이렇게 시작된다.
'밭에서 완두를 거둬 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
고 계속 내렸다. 비는 분말처럼 옹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뽀꾹이라
도 뚫고 쏟아져 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
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적시고 있었다.'
장맛비를 '두려움의 결정체'라고 표현한 것은 물론 앞으로 전개될 인간들
간의 기구한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고, 실제로 동족상잔의 비극은 지루한 장
마처럼 작품의 이곳저곳에서 힘겨운 갈등을 빚어낸다.
2001년 한국의 여름은 매년 그렇듯이 한바탕 장마로부터 시작된다. 100년
만의 가뭄으로 온 나라가 황토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채로 신음했던 것
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이젠 마치 게릴라처럼 밤에
나타나 집중호우를 뿌려대는 통에 '밤이 무서운' 지경이 돼버렸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2001년 한국의 여름은 묘하게 둘러싼 두려움
의 결정체들로 인해 국민들의 머리는 물론 가슴까지 흠뻑 젖은 물걸레처럼
천근 만근 무겁다.
집중력을 요구하는 사회
내공이 출중한 줄타기고수가 줄위에 올라갔을 때 그를 늘 불안하게 만드
는 것은 '실수'라는 복병이다. 그들은 줄위를 마치 땅위 걷듯 하면서도 '실
수'라는 강박관념에서 늘 자유롭지 못했다. 완벽한 재주를 선보여 관객들에
게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지만 '내일은 실수 하지 않을까?'하는 번뇌 때문
에 환호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일뿐이다. 간혹 꿈결에서 발을 헛디뎌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그래서 관객의 야유와 조롱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다는 줄타
기고수를 지켜주는 유일한 방패는 고도의 집중력이다. 2001년 한국의 여름
은 국민들에게 그런 집중력을 요구한다.
2001년 한국의 여름은 모든 것이 확연하게 두세력으로 나누어져 대립한
다. '진보대 보수' '개혁 대 반개혁' '적 아니면 동지' 등 명확하게 구분되
어 있는 것은 물론 이에 뒤질세라 자연현상마저도 지독한 가뭄과 지독한 장
마가 대립하는 기괴한 현상마저 일어나고 있다. 서민들의 생활은 날이 갈수
록 곤궁한데 휴가철을 맞아 해외 여행객수는 사상 최고를 기록하는 등 빈부
의 격차도 극과 극을 달린다. 이처럼 사사건건 모든 사안마다 N극과 S극처
럼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상한 기류들이 이곳 저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덩달
아 국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도 마치 꼭 어느 한쪽에 편승해야
만 살수 있을 것 같은 불안감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극과 극의 갈림
길에서 마치 고공에서 줄타기를 해야하는 긴장감 때문에 국민들의 삶은 고
달프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쉽게 간파되는 것은 아마도 TV광고가 아닐까
싶다. 청량음료 광고 중 하나. 사랑하는 남녀. 하지만 여자 쪽 집안에서 이
들의 만남을 가로막고 급기야 '어깨'들을 동원해 물리적으로 남자에게 폭력
을 가한다. 만신창이 되어 바닥에 나 뒹굴며 이 남자는 허공을 쳐다보며 이
렇게 절규한다. '우린 다 미쳤어!'. 애초에 광고주는 음료수 광고에 이런
극단적인 내용이 과연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을까 회의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극단으로 흘러버린 우리 사회의 흐름을 간파한 광고제작사는
광고주를 설득했을 것이고 결국 이 광고는 큰 인기를 끌었다. 처음 광고를
접했을 때 '이거 너무 심한 것 아닌가'라는 충격을 받았지만, 시간이 갈수
록 그 생각은 '이 얼마나 통렬한 야유인가'로 바뀌었다. 2001년 한국의 여
름, 우리는 그 광고의 남자처럼 그렇게 외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래, 우
린 다 미쳤어!'
'똑바로 살기' 운동
지난 89년 '내 탓이오' 운동을 벌여 우리 사회에 새바람을 일으켰던 천주
교가 이 사회의 도덕성 회복을 위해 곧고, 바르고, 정직하게 사는 '똑바
로'운동을 벌이기로 한 것은 꽤나 상징적이다. 이 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
던 것은 집단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엇갈린
길로 꽤나 걸어 온 작금의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다가는 나라의 운명이 심각
한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의견
을 존중하기 보다 말도 꺼내기전에 아예 짓뭉개버리는 아집과 독선이 횡행
하는 2001년, 이런 운동까지 벌여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너무 가련하다. 오
랜 군사독재정권을 타파하고 이제야 비로소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진국성 극단 대립현상이 일어나고 있
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 2001년 한국의 여름은 이런 가슴앓이로 두손으
로 가슴을 부여잡고 사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이영재(논설위원)>
>이영재(논설위원)>
한국, 2001년 여름
입력 2001-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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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26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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