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인류학개론 시간에 들은 얘기다. 아프리카엔 옷을 전혀 입지 않
고 사는 부족이 많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수치심을 모르는 것도 아니
요, 성적(性的)으로 문란한 것도 아니다. 그 가운데 한 부족은 허리띠 하나
만 걸치고 산다. 상체와 하체의 경계에 매고 다니는 가느다란 허리띠가 그
들의 유일한 의복(?)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들이 허리띠 푸는 일
을 무척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남들 앞에서 속옷을 홀랑
벗었을 때처럼…. 알몸을 훤히 드러내고 사는 처지지만 허리띠를 하고 있
는 한 옷을 차려입었다고 믿는 것이다.
 정반대 얘기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프로디테의 허리띠를 들 수 있
다. 마법의 띠(케스토스 히마스)라 불리는 이 여신의 허리띠는 음탕의 극치
다. 온갖 요상한 그림으로 장식된 이 허리띠를 매고 있는 한 유혹에 넘어가
지 않는 남성은 없다.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는 이 마법의 띠를 두
르고 숱한 남자 신과 인간을 닥치는대로 후린다. 그녀가 '아프로디테 포르
네(음란한 아프로디테)'라고 불리는 근원이 바로 이 허리띠다. '포르노'라
는 서양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요즘 포르노와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더
낯뜨거운지야 알 수 없다. 다만 마법의 띠가 아프리카 부족의 허리띠와는
전혀 다른 구실을 했던 건 분명하다.
 수치를 일깨우는 허리띠
 지난 주 우리나라 헌법재판소가 영화등급보류는 헌법에 위배된다는 결정
을 내렸다. 9명의 재판관 중 7명이 '등급분류 보류는 행정기관의 검열에 해
당하므로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을 인정하지 않는 헌법에 어긋난
다'고 판단한 것이다. 헌재의 결정은 형식상으론 영진법 제 21조 4항이 헌
법에 맞느냐 아니냐지만, 내용상으로는 우리나라 영화산업 내지 포르노 필
름의 미래와 직결되는, 사회적 파장이 자못 큰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예상대로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고, 찬반양론이 뜨겁다. '이제 저질
영화가 극장에 막 내걸리게 생겼다'며 혀를 차는 걱정파와 '어쨌거나 표현
의 자유는 100% 보장돼야 한다'는 환영그룹이 갈린다. 걱정파는 내심 못마
땅하면서도 헌재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당황하는 분위기가 역력
하다. 지지파 역시 마냥 의기양양한 것같지만은 않다. '손바닥으로 해 가리
기 식' 검열은 사라지게 됐으나 '표현의 자유'를 적절히 유통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아직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성인전용 영화관 설치 문제는 이제 불가피하고도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예전엔 자라나는 청소년 걱정 때문에 성인전용관에 적극 반
대해왔던 입장이라 하더라도, '포르노'가 일반 개봉관에서 돌려지느니 이름
이라도 성인전용인 극장에서 상영되는 게 낫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
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헌재의 결정은 우리 사회에 '성인전용관을 허하
라'고 명령을 내린 셈이다. 올가을 정기국회에서는 성인전용관을 허용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벌거벗은 임금님들에게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1930년대 중반 대중문화의 중심인물들이 당
시 총독부 경무국장에게 낸 탄원서의 제목이다. 대일본 레코드회사 문예부
장 이서구, '비너스'다방 마담 복혜숙, 조선권번 기생 오은희, 동양극장 여
배우 최선화 등이 연명한 이 공개탄원서는 댄스홀을 허용함으로써 얻어질
순기능이 당국에서 걱정하는 모든 역기능을 능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딴
스홀이 있다고 타락할 청년이라면 그것이 없을 지라도 타락할 것이외다.'
 성인전용관이 청소년들에게 미칠 악영향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
렇다고 성인전용관을 설치하면 얌전히 공부만 하던 애들이 음란의 구렁텅이
로 떼지어 떨어지기라도 하듯 호들갑을 떨 일도 아니다. 아프로디테의 허리
띠같은 포르노문화가 범람하는 근본원인은 외면한 채 성인전용관이나 막는
것은 저 아프리카 부족의 허리띠같은 발상일 지도 모른다. 이 시점에서 남
은 과제는 '성인 전용'이 '애어른 혼용'이 되지 않도록 지혜를 짜내는 일
아닐까. <양훈도(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