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새로운 특징 하나. 눈부시게 푸른 가을하늘 아래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기라곤 전혀 볼 수가 없다. 가을의 풍요로움과는 달리 표정은 몹시 화가 난 사람들 같다. 신호등에서 정차한 버스. 버스안 승객들 역시 무표정이다. 열명이면 열명 모두 정지된 화면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다. 멍하니 거리를 쳐다보거나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고뇌하는 표정. 더러는 허둥대기도 한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조폭과 관련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안. 폭소가 여기 저기서 터진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면 마치 약속이나 한듯 극장문을 빠져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있다. 불과 1분전만해도 포복절도하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 어두운 공간에서 빠져 나오는 순간, 그들은 일상의 무표정으로 돌아온다.
누가 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표정을 어둡게 만들었을까. 비단 얼굴뿐만이 아니다. 열어보지 않아도 그들의 가슴이 말못할 여러가지 이유로 시퍼렇게 멍들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치판은 짜증나게 만들고, 경제는 어렵고, 주식에서 깡통차고, 경마장에서 돈 날리고, 아이들의 성적표를 보면서 울화가 치밀고, 신문을 보고 뉴스를 들어도 기쁨이라곤 눈 씻고 찾아 볼 수 없는, 그래서 짜증이 나고 화만 치미는 그들의 모습, 그것이 바로 답답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모두가 예스할 때 노 할 수 있는 사람. 모두가 노할 때 예스 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그리 많지 않다. 오죽했으면 광고 카피로 이 구절을 써 먹었을까마는 이 광고를 접할 때마다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순진한 국민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소위 대한민국을 이끌어 간다는 특권층이 최소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예스와 노를 분명히 했어도 국민들이 이토록 우거지상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 잘못된 길을 가는 줄 알면서도, 나라의 기강이 흔들릴 정도로 그릇된 정책이 진행되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우리에겐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정치, 경제, 심지어 공무원의 세계에서도 이런 소신이 뚜렷한 사람을 만나기란 힘들다. 만일 어느 조직에서든 예스나 노를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의 구성비율이 6대4를 유지한다고 해도 이 사회가 이렇게 혼탁의 길로 접어들진 않았을 것이다. 99대1의 비율로 올바르고 깨끗한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다. '목이 몇 개야?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잘리면 어쩔려구' 운운하며 자신들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애써 눈을 짐짓 감아버리고 스스로 '예스 맨'으로 전락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 어떤 조직이건 예스맨이 많을 경우 그 조직은 투명성이 상실되고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다. 최종 선택을 해야하는 최고위층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재벌이 몰락하고 역대 정권마다 레임덕 현상이 너무 쉽게 찾아오는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농사가 대풍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쌀값하락이 마음에 걸리지만 풍년은 그래도 즐거운 법이다. 거꾸러져 만신창이가 되어 다시는 소생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주가도 이제 서서히 고개를 쳐들며 바닥을 벗어나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길고 지루했던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 마침내 한줄기 서광이 비추려는 모양이다. 그 덕분인지 하늘도 푸르다. 바야흐로 천고마비의 계절인 것이다. 넉넉한 미소와 풍요로운 인심이 넘쳐난다. 이래야 살맛이 나는 세상이 아닌가.
그런데 왜 모두들 무표정인가. 10여년 만에 찾아 온 대풍을 맞는 이 좋은 계절, 왜 모두들 짜증을 내고 냉소를 뿌리고 허탈해 하는가.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의 입에서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비극이다. <이영재(논설위원)>이영재(논설위원)>
아니다, 그렇지 않다
입력 2001-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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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24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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