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끝이라고 생각하면 누구나 대담해지는 법이다.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소심하다는 이유로 여자에게 절교선언을 당한 남자가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헤어지는 그 장소에서 여자의 뺨을 후려쳤다는 꿈같은 이야기는 모두 그런데서 연유된다. 일단 끝이라고 생각하고 떠나는 사람이 무슨 행동이나 말을 못할까.
만신창이가 되었던 제일은행의 최고 경영진으로 취임했던 윌프레드 호리에 은행장이 의미심장한 몇 마디를 남긴 채 얼마 전 한국을 떠났다. 잔여임기가 1년6개월이나 되고 무려 421만주의 스톡옵션까지 포기했다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니까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는 떠나는 자리에서 “한국에서 일하다보니 이 나라 장래가 걱정스러웠다. 국회의원, 공무원, 언론 등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던졌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의 책임자로서 참고인 자격으로 국정감사장에 불려갔던 그는 국회의원들이 약속이나 한듯 했던 질문을 또 하고 막상 답변을 하면 의원들이 졸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사업상 바쁜 CEO를 오전 9시부터 저녁7시까지 붙잡아 놓고 농담하듯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을 하는, 그런 국회의원이 있는 이 나라가 걱정스럽다는 말도 했다.
그는 또 한심한 공직자들의 문제점도 꼬집었다. 기업과 관련한 법과 규제들이 가만히 들여다보면 너무 모호한 부분이 많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이라 그런 것들이 모두 규제가 되어 한국 투자에 걸림돌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점포 확장을 위해 신규 투자를 할 때마다 공무원들의 까다로운 규제로 애를 먹었으며, 막말로 정부 부처가 없어도 잘 돌아갈 일이 그들이 있음으로해서 안되는 일이 한국에는 너무 많다고 말했다. 언론에 대해서도 아프게 꼬집었다. 사실에 근거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호적인 인사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게 기사를 쓰다가도 비우호적이면 감정이 곁들인 가차없는 비판이 따른다는 뜻이다.
그의 마지막 기자회견장에 동석했던 다른 외국기업 CEO들도 호리에의 발언에 공감했던지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는 후문이다. 아마 그들도 한국을 떠나는 날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푸념을 호리에처럼 쏟아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답답하고 우울하다. 파산 직전 무려 16조원의 공적자금을 쏟아 부었으나 단 5천억원에 매각돼 국민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은행. 개선장군처럼 무려 30억원의 연봉을 받으며 은행의 최고 경영자로 군림했던 호리에가 한국을 떠나는 날 던졌던 말 몇마디 때문이 아니다. 한국에서 몇 년간 근무해 한국인들이 덕담에 얼마나 약한지 어느 정도 알만한 호리에가 우리를 너무 말랑하게 보았구나 하는 자괴감 때문도 아니다.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고 떠난다. 끊임없는 구조조정을 통해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길 당부한다. 한국은 그런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나라다'라는 덕담 몇 마디에 인색한 그의 속좁은 행동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호리에의 푸념이 우리에게 전혀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는 것, 늘상 보아오고 경험했던 것이므로 그렇게 놀랄만한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바보에게 바보라는 말은 더 이상 욕이 아니다. 하지만 바보에 근접해 있는 사람에게 바보라고 말하면 그건 분명 욕이다. 호리에의 푸념에 마치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말도 못하고 속으로 '그래 넌 잘났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한마디로 바보다. 외국인 투자가들에게 수없이 많은 비아냥을 당했으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한국에서는 한국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우리는 바보다. 언제까지 이렇게 바보처럼 살것인가.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