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13일은 목요일이다. 이날 아침 눈을 떴을 때 '평균적인' 한국인은 무슨 생각부터 할까. 코스타리카와 브라질이 수원에서 오후 3시30분에, 터키와 중국이 서울에서 같은 시각에 경기를 갖는다는 것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또 저녁 8시반에는 요코하마에서 에콰도르와 크로아티아가 붙고, 오이타에서는 이날의 빅카드 멕시코 대 이탈리아전이 벌어진다는 것도 아마 잊지 않을 것이다.
이미 한국이 폴란드(4일)와 미국(10일)을 꺾고 16강전에 안착한 뒤라 한결 느긋해진 마음으로 오늘의 경기를 기다릴 수도 있고, 내일(14일)의 포르투갈전 결과에 따라 16강이 결정된다면 자신이 히딩크라도 된듯 '필승전략'을 구상해 보느라 마냥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미룰 지도 모른다. 더러 광적인 팬들은 전날 일본에서 치러졌던 아르헨티나-스페인전이나 나이지리아-잉글랜드전의 녹화중계를 밤늦게까지 시청하느라 아예 잠에 곯아떨어졌을 수도 있다. 오늘은 공휴일 아닌가.
전국 지방동시선거일의 아침은 아마도 그렇게 밝을 확률이 높다. 상상력이 빈곤한 나만 이렇게 예상하는 걸까. 상당수의 건전한 유권자는 그래도 '축구는 축구, 자치는 자치'라며 투표장으로 갈까. 월드컵 개막과 꼭 겹치는 선거운동 기간동안 중계시간에는 축구에 열광하고, 뉴스와 유세시간에는 향후 정치구도를 살펴가면서 '내고장일꾼'을 결정할까. 그게 정답이겠지만, 세상이 정답대로 돌아갈 것같지 않다는 염려는 지나친 노파심일까.
'월드컵 붐'이 일지 않아 노심초사했던 관계자들은 이제 한 숨 돌려도 될 듯하다. 지난 1일 부산의 조추첨 행사는 확실히 월드컵이 개막됐음을 '평균적' 한국인들의 마음에 심어주었다. 지금부터는 이 마음들을 행사준비에 끌어들여 어떻게 에스컬레이트시킬 것인가 궁리하면 된다.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결정적인 고비는 넘어갔고, 마무리만 남은 셈이다. 오히려 지금부터 걱정해야 할 것은 월드컵과 완벽히 겹치는 지방선거가 아닐까.
지난 봄 월드컵을 피해 지방선거를 앞당기는 문제가 공론화될 때만 해도 대부분의 시민은 그저 추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세계적 축제와 선거를 동시에 치르자면 정신없겠구나 정도였다. 이를 피해 선거를 앞당기면 어떻겠나 잠시 궁리를 해 보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장단점이 있다 하니 '속편하게 법대로 6월13일에 치르지, 뭐' 하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확실히 달라졌다.
한·일 공동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러내야 하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볼 때 월드컵은 일과성 행사이지만 지방선거는 그렇지 않다. 한국이 16강에 든다고, 아니 우승을 한다고 우리의 지방자치가 4년동안 저절로 굴러가나? 이론적으로는 별개의 선거지만, 연말 대선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지방선거의 의미까지 고려하면, 월드컵 성공개최를 위해 나라 전체의 향후 5년 운명과 직·간접으로 연결될 선거를 그냥 그 열기 속에서 그렇게 치러도 괜찮을까.
지난달 23일 밤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여·야는 기존입장을 재확인하는 데 그쳤다. 민주당과 자민련은 '법대로' 6월13일에 선거를 하자는 주장이고, 반면 한나라당의 당론은 5월초로 당기자는 것이다. 모르기는 해도 각자 선거시기가 미칠 득표력과 유·불리를 치밀하게 계산한 끝에 얻은 결론일시 분명하다. 각자 내세우는 이유도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여기서 섣불리 어느 쪽을 편들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축구공은 둥글고, 정치는 생물(生物)이어서, 선거시기와 각자의 속셈은 예상과는 전혀 달리 돌아갈 수도 있다는 점만은 지적해야겠다. 그럴 바에야 국민들이 일찌감치 지방일꾼을 신중하게 뽑아둔 상태에서 2002년 6월13일엔 홀가분하게 축구에만 관심을 쏟을 수 있도록 선거시기를 변경하는 게 어떨까. 그게 월드컵도 성공시키고 지방자치도 구해내는 길 아닐까. <양훈도 (논설위원)>
양훈도>
2002년 6월 13일 풍경
입력 2001-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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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03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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