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칙 없는 축구가 재미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깊숙한 태클, 거친 몸싸움이 없는 '범생이 축구'에 무슨 박진감이 있을까. 반칙이 너무 많아 경기흐름이 자주 끊겨도 맥빠진 경기가 되지만 몸을 던지는 투혼이 없는 경기 또한 축구팬들을 실망시키게 마련이다. 반칙도 이제는 현대축구의 한 작전 아니겠는가.
그라운드의 신사들은 이런 솔직함에 강하게 어필할 지도 모른다. 그러면 차라리 격투기를 보러 가라. 그런 비난을 들어도 싸다. 야성을 빙자한 가학성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을지도 모르므로…. 하지만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게 아니다. 어차피 승리를 향해 뛰고 있는 선수들이라면 몸을 사리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룰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는 야생마처럼 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월드컵이 세계적인 단일 스포츠축제가 된 이유도 이런 역동성에 있지 않을까.
심판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에겐 선수들의 지나친 행동을 제재하면서도 경기의 맥을 이어가는 '조율사' 역할이 주어져 있다. 물론 하석주에게 가혹한 퇴장명령을 내린 것도 심판이고, 마라도나가 손으로 골을 집어넣는 걸 잡아내지 못한 것도 심판이다. 그래도 심판은 중요하다. 심판이 있기에 우리는 그나마 공정한 경기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축구경기에서만 심판이 중요할까. 우리 사회의 '심판들'은 제구실을 하고 있는 걸까. 지난주 이 문제를 다시한번 떠올리게 하는 소식이 있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윤리의식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것이다. 가슴 답답한 내용이지만 또 들여다 보자.
'반부패국민연대'에서 중고생 1천여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 보았더니 90%가 '한국은 부패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잠시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새로울 게 전혀 없는 얘기다. 매일매일 뭔 게이트다 뭔 리스트다, 그것도 모자라 각계각층 '선수'들이 꼬리를 물고 잡혀들어가는 나라에서 그런 결과가 안나오면 되레 이상한 것 아닌가.
오히려 '부패하지 않았다'고 대답한 학생들은 뉴스도 안보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인터넷에서 설문조사 내용을 다운받아 살펴보니, 반부패교육을 받은 학생 그룹은 99%가 '우리나라는 부패국'이라고 답했단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청소년들은 정직하게 '임금님, 벌거벗었다!'하고 외치고 있는 것 뿐이다.
청소년들의 윤리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우려가 여기저기서 제기됐다. 10명 중에 4명이 '아무도 보지 않으면 법질서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했고, 16%는 '감옥에서 10년을 살아도 10억원을 벌 수 있다면 부패를 저지를 수 있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밝고 건강하게' 자라야할 청소년들이 일부나마 이런 마음을 먹다니 걱정스럽긴 하다.
그러나 이 역시 다시 생각해 보자. 과연 기성세대 몇 퍼센트가 나홀로 법질서를 지키고 있나. 10억원의 유혹 앞에 떳떳할 어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애들은 그저 어른들을 보고 충실하게 따라배우는 중이다. 이들이 점점 커가면서 몰래 법을 어기고, 일확천금의 유혹에 무너지는 비율이 더 늘어난다는 게 더욱 심각한 문제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반부패교육도 교육이지만 이 사회를 어떻게 '반칙'(부패)의 늪에서 건져 내느냐가 더 시급한 게 아닐까.
거듭 말하지만, 우리 사회는 지금 공정한 '심판'이 절실하다. 월드컵을 빛내줄 '심판들'처럼 날카롭게 호루라기를 불어줄 '심판들', 즉 법과 제도와 감시자가 너무나도 아쉽다. 올해 선거판에서도 '심판들'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의 정직한 전망대로 더 부패한 사회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올해의 화두 '페어 플레이'를 진정 원한다면 심판의 자세부터 가다듬어야 할 시점이다. 나는 이 반칙투성이 경기에서 정직하고 용감하게 휘슬을 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실 청소년걱정은 그 다음 문제다. <양훈도 (논설위원)>양훈도>
'심판'이 문제다
입력 2002-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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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0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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