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미국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이라 규정했다. 그의 참모들도 연이어 대북 강성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일촉즉발의 험악한 분위기다. '악의 축'과 지리적으로 붙어있고, 핏줄이 같은 우리로서는 그 진짜 속내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지금까지 제기된 설들을 검토해 보자.
첫째, 유치한 이분법과 단순·무식·과격한 텍사스식 언행이라는 주장이다. 전쟁놀이하는 아이들에게 '우리나라'의 상대어는 '다른 나라'가 아니라 '나쁜 나라'다. 차이와 선악 조차 구별 못하는 소년기적, 아니 유아적 정신상태다. 세계최대국가의 지도자가 설마 이런 미숙한 지적능력밖에 안되랴마는, 9·11테러 직후 세계를 '미국편'과 '악의 편'으로 신속하게 재편성한 사례로 미루어 이게 사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도 의외로 이게 정답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둘째, 궁지를 모면하려는 정치적 수사(修辭)라는 견해다. 엔론게이트라는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추문으로부터 국민들의 시선을 돌려보려는 고도로 계산된 언행이라고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도된 엔론과 부시패밀리의 관계, 연루된 각료의 숫자나 의원의 비율만 보더라도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엔론게이트가 활짝 열려 망신당하느니 '악의 축'을 응징하면 인기도 올라가고 '악'으로부터 지구를 지킬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다. 이 설의 변형으로 11월 중간선거를 의식한 발언이라는 추정도 있다.
셋째, 위기를 조장해 잇속을 챙기려는 의도라는 분석이다. 이를테면 한반도에 위기가 닥쳐오고 있으므로 F-15 전투기를 비롯한 우리 무기를 잔뜩 사두라는 메시지로 보는 것이다. 우리 말 안들으면 진짜 위기상황을 일으켜 혼을 내주겠다는 뜻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미국이 우방을 상대로 그런 비열한 장사를 하겠느냐고 반문하는 순진한 독자가 혹시 있다면 '가자! 아메리카로'라는 리오 휴버먼의 미국사 책을 읽어보기를 간곡히 권하고 싶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작동원리가 아주 쉽고 재미있고 생생하게 쓰여 있다. 이 설은 가장 강력한 정답후보이며, 2월 중으로 정오(正誤)판별이 가능할 듯하다.
넷째, 지구상에서 가장 의뭉스러운 국가 북한으로 하여금 핵과 미사일개발을 포기하고 대화의 자리로 끌어내기 위한 강력한 압박이라는 해석이다. 이는 우리 정부나 일부 친미적 인사들의 공식적 견해에 가깝다(하지만 그들이 속으로도 정말 그렇게 믿는 지는 알 수 없다). 한데, 이 견해의 약점은 미국이 강하게 압박했을 때 북한이 그에 굴복했던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번처럼 '선전포고'라며 거품을 물거나 '서울 불바다' 운운하며 길길이 뛰었을 뿐이다. 갈등기를 지나 이어진 대화국면을 강한 압박의 결과라고 설명할 수는 있겠으나, 견강부회라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다섯째, 진짜 북폭을 앞둔 경고라는 무시무시한 진단이다. 우리 정부는 애써 전쟁가능성을 부인하고 있고,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반응도 '설마 전쟁이 나랴'는 분위기지만, '설마가 사람 잡을' 가능성에서 눈을 떼기도 어렵다. 미국내 분위기가 '악의 축' 응징에 전폭적으로 찬성하고 있는데다, 강경파들은 일격에 북한을 거꾸러뜨릴 시나리오의 성공가능성을 호언장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정답이 아니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정답은 이상 다섯가지 분석 중 하나일 수도, 그 모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정답이 무엇이든 진정한 문제는 우리의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맞고함을 지르는 미국과 북한의 새중간에서 우리가 겁먹은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는 꼴이다. 이건 아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끌려만 다닐 건가. 미국에겐 우리도 당사자임을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어야 하고, 북한에게는 민족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가자는 확고한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 부시대통령의 방한이 중요한 고비임에 틀림없다. <양훈도 (논설위원)>양훈도>
'악의 축' 발언의 진의
입력 2002-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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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05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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