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저녁의 일이다. 모처럼 온 가족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동계올림픽 중계방송을 보고 있었다. 무슨 종목인지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미국과 네덜란드 선수가 치열한 선두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대학생인 아들녀석과 딸이 박수를 치며 네덜란드선수를 열심히 응원을 하더니 끝내 미국선수를 제치고 우승하자 벌떡 일어나 환호했다. 마치 우리나라 선수가 금메달을 딴양….
올림픽의 기본정신은 페어플레이다. 그래서 선수나 임원 심판 등 모든 참가자들이 정정당당하게 경기에 임하겠다는 선서를 한다. 그렇지만 이번 동계올림픽은 미국민외 전세계 어느나라 국민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우리 김동성 선수가 출전한 쇼트트랙 남자 1천500m 결승전만해도 누가 보더라도 분명한 오심이었다. 전세계 수억명의 시청자가 지켜보았으며 느린 동작으로 반복해 보아도 심판판정이 잘못됐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국수주의적 애국심과는 결코 다르며 반미감정만도 아니다. 공정한 게임의 법칙이 지켜지지 않은데 대한 항의이며 불만의 표출이었다. 물론 경기에서의 심판판정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심판도 인간인지라 순간적으로 그르친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이번 대회의 판정시비는 초반부터 꼬리를 물더니 급기야 공동 금메달수상이 나오고 순위가 뒤바뀌는 물의를 일으켰다. 오죽했으면 김동성 선수와 나란히 승부를 다투던 이탈리아 선수마저 '판정이 잘못됐다'고 했을까. 국제올림픽 위원회의 홈페이지가 우리 네티즌들로부터 쏟아진 항의메일이 폭주하는 바람에 마비됐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특히 이번 대회는 미국의 오만함과 텃세가 판을 쳤고, 심판들의 그릇된 애국심은 담합판정과 오심으로 이어져 되레 나라망신을 자초한 결과를 초래했다. 개막전부터 뇌물스캔들로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9·11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한다는 뜻으로 찢어진 성조기를 들고 나온 것도 그렇다. 결국 세계인의 축제를 자신들만의 안방잔치로 스스로 전락시킨 추악한 선례를 남긴 꼴이다. 그런데도 미국 전역에 방영되는 NBC방송의 토크쇼 진행자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미국인들의 뻔뻔스런 단면을 그대로 드러냈으니 기막힐 노릇이다.
기성세대들만해도 미국의 횡포에 대해 그래도 관대한 편이다. 그렇지만 젊은 신세대들의 사고는 크게 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걱정스럽다. 당장 우리집 두 아이들만 해도 미국에 대한 감정이 편향적으로 변해버렸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이 평소 '반미감정'을 갖고 미국문화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미국은 6·25전쟁에 참전해 한국의 자유를 지켜준 혈맹으로 50여년간 동맹관계를 유지해온 우방이다. 한미동맹이 흔들릴 경우 우리의 안보와 경제도 흔들린다. 북미관계가 최대변수로 작용하고 있는 현실에서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해서도 공고한 한미동맹의 유지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미군의 민간인 학살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용산기지 반환을 둘러싼 한미간의 마찰, 한미주둔군지위협상(SOFA) 불평등조항 개정문제 등이 얽히고 설키면서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 나왔고, 미 국방부는 한반도를 국지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발표, 우리 국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의 정책에 대한 비판 견제와 맹목적 반미주의는 엄연히 구별돼야 한다. 비록 부시정권의 대북정책을 놓고 입장차이가 있다해서 극단적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반미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않는다. 페어플레이가 사라져 마치 안방잔치로 전락했던 동계올림픽에 대한 분통만 터뜨리지말고 국익을 위해서라도 상호 신뢰회복 노력도 병행하는 것이 한·미관계를 원만히 풀어나갈 유일한 해법임을 명심해야 할 때다. <송광석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