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번 달 이사를 가는 직장 선배가 출근하면서 “지겨워, 지겨워”를 연발한다. 손없는 날이라고 해서 이사날짜와 이삿짐 업체까지 정해놓았는데 이사업체가 느닷없이 웃돈을 요구하더라는 것이다. 정도를 걸으며 살아왔던 선배는 업체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응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정해 놓은 날짜에 이사하기를 포기했다. 아주 하찮은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이삿짐 업체의 이같은 비윤리적인 상도덕은 지금 우리사회의 일그러진 현상의 단면을 보여준다. '손없는 날'은 이삿짐업체의 대목일 것이다. 그런 날 한 밑천을 잡으려는 일부업체들의 얄팍한 상혼은 이사로 들떠있는 선배와 가족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2. 얼마전 주가가 40포인트가 넘게 폭락했다. 객장의 개미투자자들 입에서 “지겨워, 지겨워”라는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미국주가의 약세로 외국인들의 줄기찬 매도공세 때문이었지만 그날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그룹의 L화학이 계열사인 L석유화학의 주식을 대량매입하기로 결정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그룹사가 대주주에게 상장 전에 L석유화학의 주식을 싼값에 팔았다가 상장 후 비싼 값에 재매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주주에게 막대한 이득을 안겨주었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이런 대기업의 부도덕성이 개미투자자는 물론 기관투자가, 외국인투자자들에게 기업의 투명성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켜 결국 그날 특히 개미투자자들은 금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 치욕적인 IMF를 경험한 후 기업의 투명성이 나아졌다는 평가가 내려진 상황에서 재벌의 이같은 행위가 많은 이들을 지겹게 만들었다.

3. 역 대합실. 어느 중년의 남자가 신문을 보다말고 갑자기 “에이, 지겨워”라고 소리치며 신문을 내동댕이 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겠어”라는 그의 푸념. 그러면서 그는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그 중년사내가 벌컥 화를 낸 것은 군포 4인조 강도 기사 때문이었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고 여죄를 추궁한 결과, 두 달여 동안 7명을 살인한 것 외에 여러건의 살인사건을 더 저지른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번 사건은 한때 사회를 전율케 만들었던 '지존파' '막가파'가 저지른 것보다 더 끔찍한 사건이다. 그런데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명씩, 한명씩 주변의 사람들이 그렇게 사라지고 있는데 도대체 경찰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치안부재. 내 생명은 이제 내 스스로 지켜야 하는 개탄스런 세태가 그 중년사내를 지겹게 만들었을 것이다.

4. 오랜만에 서점에 들렀다. 그 넓은 매장이 마치 절간처럼 조용하다. 출판업계가 지독한 불황이라는 말이 실감된다. 서점 직원은 “신문이 더 재미있는데 누가 책을 읽겠어요. 지겨울 정도예요”라고 말한다. 하긴 신문에서 보도되는 각종 의혹사건들을 읽는 재미가 더 쏠쏠한데 누가 한가하게 책을 읽을 것인가. 이책 저책 고르다가 한 권을 집어들었다. 요즘 잘 나가는 신예 여류소설가 배수아의 '나는 이제 네가 지겨워'다. 그 많고 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고른 것은 순전히 제목 때문이다. 절묘하다. 지금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분위기를 단 한 줄에 요약해 놓았기 때문이다. 지겹다고? 그런데 당신은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지겨운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녀석에게 “요새 잘 지내?”라고 물어보면 열중 여덟은 “지겹지 뭐”라고 말한다. “뭐가 그렇게 지겨운데?”라고 물으면 대개가 “그냥 지겨워”라고 대답한다. 모두 지겹고도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5. '지겹다'의 사전적 의미는 '몸서리가 쳐지도록 싫다'라는 뜻이다. 몸서리가 쳐진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런데 왜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살벌한 의미의 '지겨워'를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일까. 샘처럼 끝도없이 솟아나는 특권층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비리로 인해? 눈곱만큼의 희망도 주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구태 때문에?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주식?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에 학교에 갔다가 파김치 되어 돌아오는 자식을 이렇게 만든 공교육의 허구? 아무리 발버둥쳐도 변함없는 일상의 권태로움과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도대체 왜 국민들이 이토록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몸서리가 쳐지도록 싫다고 느끼고 있는 것일까. <이영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