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 없이 가족의 이름들을 홀로 나직이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과거의 아픈 기억이든, 오늘의 찢어진 관계든, 미래의 불안이든 가족은 생각만으로도 엷은 물기가 촉촉하다. “아버지 된 입장에서 도움이 되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너의 행복과 전정(前程)을 가로막는 결과만 빚고 있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어디서 잘못된 걸까. 신록이 사랑스레 푸르른 오월이 가정의 달인 것이 차라리 잔인하다. 모든 못난 아비 어미와 불효자는 카네이션이 눈물겹다.

영화 '집으로…'가 벌써 관객 200만명을 넘어섰다. 극장 안은 어린 아들 손을 잡은 아빠 엄마로 가득하다. 저게 원래 가족이야. 켄터키 치킨과 백숙은 도저히 어울릴 수 없지만, 그래도 소통은 가능하단다. 휴대용 전자오락기 뒤에 붙인 외할머니의 2천원처럼, “보고싶다”는 상우의 미리 그린 엽서처럼…. 어른들은 울음을 목울대가 아프게 삼키고, 팝콘을 손에 든 아이들은 을분할매의 꼬꼬댁 수화가 우습기만 하다. '집으로…'는 깨져가는 가정에 대한 헌사일까. '모든 외할머니에게 바치는 영화'를 보고 나오는 마음이 묵직하다.

지난달 '사이버 팸'의 기사가 체증인 듯 명치께를 누른다. 사이버와 패밀리의 합성어란다. 어느 포털사이트 한곳에서만도 사이버 팸이 2천 가족을 넘어섰다고 했다. 또래가 엄마고 아빠고 삼촌이고 누이고 형제다. 소꿉놀이라기엔 서글프다. 사이버 팸을 만들었던 여고생 일행이 오프라인에서 만나 성매매로 돈을 벌었다고 했다. 어떤 환경이 이들을 유사가족에게 더 애착을 갖게 만들었을까. 그들을 결코 칭찬할 수는 없지만, 사이버 팸에게서 정을 찾아야 했던 아이들의 외로움만은 또렷하다. '전통가족'은 이미 무너진 걸까.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홈 스위트 홈'을 지은 존 하워드 펜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했다. 얼마나 가족이 그리웠으면 그런 노래를 다 만들었을까. '젊은 사슴에 관한 은유'(박범신)에서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사이버 팸'들의 정처 잃은 마음들이 또한번 아프게 다가온다.

소설가의 아버지가 속병을 고치려 '똥물'을 마시고, 충치 어금니를 손가락으로 뽑아내는 대목도 가슴이 찡하다. '너 때문이야'라고 아버지는 속으로 말씀하셨을까. '너 때문에 좀더 내가 살아야 한다고, 좀더 살고 싶다'고 아버지는 소리치고 싶었을 것이다.…누구의 아버지가 아니라, 사회 속의 한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원초적 인간으로서의 아버지가 짐져야 했던 고독하고 눈물겨운 그 싸움을 나는 왜 이제야 이해하게 됐는가.”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러나 가족은 더이상 혈연이 아니다. 소통이다. 우리가 혈연의 끈을 어찌 놓칠 수 있을까마는, 이젠 피보다 소통이 먼저다. 통하지 않는 혈연은 더이상 가족이라 부르기도 어렵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복제의 시대' '사이버 팸'의 시대가 아프게 가르쳐 주는 진실이다. 을분할매와 상우처럼 화해하고 소통이 될 수 있는 한 우리의 가족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콜리아'라는 체코 영화가 있었다. 공산체제와 등진 늙은 독신 첼리스트와 그의 운명에 우연히 끼어든 소련 출신의 꼬마 콜리아가 '가족'으로 재탄생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자유주의 예술가는 콜리아가 성가시기만 하다. 소련에 대한 미움을 아이에게 투사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가슴 밑바닥에는 남아있던 인간이 서서히 아이를 받아들이게 한다. 콜리아를 잃어버린 첼리스트가 프라하의 지하철 방송에 대고 러시아말로 꼬마를 애타게 찾는 장면은 지금도 떠오른다. 가족은 그렇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

'콩가루 집안'에도 희망은 있다. 그동안의 일들이 미안하지만 말로 담아내기엔 쑥스럽다면, 을분할매처럼 오른손을 들어 가슴을 두어바퀴 돌리면 된다. 사이버 팸들이 인터넷에서라도 정을 되찾고, 그걸 다시 현실의 아픈 가족에게 돌렸으면 싶다. 다시 나직이 가족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오늘이 어버이 날이다. <양훈도 (편집부국장 대우 지역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