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이 텅빈 무대에서 대사를 읊어야 하는 배우는 얼마나 외로울까. 관중이 없는 그라운드에 선 비인기종목 선수의 비애는 또 얼마나 클까. 6·13 지방선거를 앞둔 한국정치가 관객없는 배우, 관중없는 경기 꼭 그 꼴이다. 유권자의 관심이 모두 월드컵으로 쏠렸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한국정치가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다. '퇴출의 벼랑'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부도난 정치'이기 때문이다. 아니 정치보다는 월드컵이, 정치인들 보다는 축구스타가 좋다는데야 할말이 없는 것 아닌가.

국민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월드컵은 화합과 상생과 활력을 제공하는 이벤트다. 16강을 향한 염원으로 한국인은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뿌듯한 화합의 기쁨을 맛보고 있다. 97년 매서운 북풍을 타고 IMF위기가 급습했을 때 첫애 돌반지까지 달러로 바꾸면서 우리가 하나임을 느꼈던 벅찬 감동 이후 모처럼 맛보는 '하나'의 기쁨이다. 더구나 그때는 살기 위해서 하나가 되어야 했지만 이번에는 '업그레이드 코리아'를 위한 하나이니 감동의 차원이 더 높을 수밖에 없다. 또 이번 월드컵은 88서울올림픽 이후 모처럼 우리가 주인이 된 세계인의 축제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와 아시아를 벗어나 명실공히 지구촌의 떳떳한 일원으로 등장했다. '한국'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세계'라는 열린 공간으로 진입해 지구촌 모든 국가와 민족과의 상생(相生)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라는 감격적인 자기확인을 바탕으로 '세계인과의 상생'을 꿈꾸는 한국인은 그래서 요즘 활력이 넘치고 있다. '붉은악마'들의 정열적인 응원을 보라. 한반도에는 그 어느때 보다 국민적 에너지가 용솟음치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한국정치는. 시쳇말로 게임이 안된다. 월드컵이 국민에게 제공하는 화합의 기쁨, 상생의 희열, 미래를 향한 활력. 이중 하나도 제공하지 못한 채 거추장스러운 퇴물 취급을 받고 있다. 유권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기네들 마음대로 텃밭을 나누어 표를 독점하려는 분열의 상혼(商魂)을 보이고 있다. 각 정당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한반도의 남단을 크게 갈라먹으려 하고 출마자들은 시·군별로 읍·면별로 또 나누어 먹으려 한다. '단 한표라도 빠져나가면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고 외치고 있는 형국이다.

상생, 한국의 정치사전에는 없는 단어다. 대신 상멸(相滅)은 'ㅅ' 항목에 특별히 맨앞에 나와있지 싶다. '너죽어야 나산다'는 말은 한국정치인들에게 금과옥조(金科玉條)다. 비방하고 모략하고 음해해서 상대를 인간 이하로 만들어야 선거가 끝나는 정치가 한국정치다. 서로 그러하니 상멸이랄 밖에. 당락(當落)을 떠나 정치인들과 정당은 서로 원수가 되어 정말 끝장 볼때까지 자웅을 가리는 게 우리 정치다. 요사이 대선후보들의 '막말'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판이 이러니 '품위'란 애당초 기대가 어렵다고 봐야한다.

그러니 분열과 상멸의 정치로 기(氣)가 쇠할대로 쇠한 정치인과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없는 건 너무 당연하다. 한국정치를 향해 미래에 대한 비전과 활력을 구한다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찾기요, 나무에서 물고기 찾자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데 한국정치의 더 큰 비극은 공멸의 상황인데도 사지(死地)를 벗어나려는 의욕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가치와 철학과 도덕의 부재가 진정한 비극인 것이다. 벼랑끝에 매달려서 마저 아귀다툼이니, '벼랑끝 정국'은 이럴 때 딱 한번 써야지 싶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이번 월드컵을 보고 각성해야 한다. 국민 관심이 왜 월드컵에 집중되는지. 그리고 자신들은 왜 텅빈 광장에서 홀로 서있는지, 왜 이렇게 됐는지 집단적인 숙고와 각성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활로(活路)를 열 수 있을 것이다. 국민에게 화합과 상생의 기쁨을 안겨주는 정치, 미래를 향한 활력을 불어넣는 정치를 위한 환골탈태(換骨奪胎)야 말로 모든 정치인들의 화두가 되어야 한다. 한국정치가 더 이상 천덕꾸러기 노릇을 한다면, 벼랑끝의 구세주인 국민은 결국 손을 놓아 버릴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윤인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