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영웅들이 '월드컵 4강 오디세이'의 신화를 써내려갔던 6월이 꿈결속에 지나갔다. 한국인은 '황홀한 6월의 기억'에서 깨어나기 싫어 7월의 첫머리를 영웅들을 위한 축제일로 바치고 있다.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하루를 쉬었고 어제는 수도 서울이 온통 개선 영웅들을 맞는 환희로 넘쳤다. '대~한민국이여 이대로만 영원하라'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외치고 있었다.

축제는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영웅들이 그들의 모험에 마침내 웅장한 마침표를 찍으려던 그날 신은 우리에게 값진 희생을 요구했다. 우리의 '주적(主敵)'이 겨눈 정조준 포화에 꽃보다 아름다운 젊은 영혼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7월의 첫머리에 우리는 찬물을 뒤집어 쓴 채 냉정한 현실이 우리 것이었음을 깨달아야 하는 잔인한 하루 하루를 살고 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인데도 우리는 축제를 즐기는 사람이기도 하고, 비극에 분노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월드컵 찬가(讚歌)에 환호하면서 냉전(冷戰)의 장송곡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우리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인류와의 공존을 희망하는 발신부호이지만 '대한민국'은 적과 대치중인 긴장된 공간의 상징이기도 하다. 태극기는 월드컵 패션이면서도, 전사 장병의 관을 휘덮고 있을 때는 여전히 수호해야 할 절대(絶對)의 표상이다.

지금 국민들은 축구영웅들의 4강신화 대장정으로 시작해 서해상의 작은 전쟁으로 매듭된 6월을 보내고, 그 축제와 전쟁이 남긴 희비의 감정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난감한 심리상태에서 7월을 시작하고 있다. 성취감과 낭패감을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감정 과부하 상태에 걸린 셈이다. 자연히 한국인으로서 21세기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삶의 정체성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의 기호와 상징에 대한 해석이 극(極)을 달리하고, 같은 공간에서 축제와 전쟁을 같이 치러야 하는 우리는 삶의 좌표를 어디에 맞추어야 할 것인가. 글쎄, 어차피 현실을 인정하는데서 삶의 좌표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공간과 시간을, 그리고 우리의 기호와 상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개인이든 국가이든 현실을 철저히 직시해야 미래를 희망으로 채울 수 있는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기에 그렇다.

어차피 월드컵을 세계적인 축제로 성공시킨 건 우리고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남북사이에 200만에 달하는 무장군인과 서로를 몇번이든 궤멸시킬 수 있는 화력이 집중된 한반도의 반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 또한 우리고 대한민국이다. 공존의 희망과 공멸의 긴장이 서로 역동하는 팽팽한 현실속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인정하되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공존의 희망은 키워나가되, 공멸의 긴장은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때로는 급격하게 때로는 천천히 줄여나가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멸의 긴장을 줄이는데 힘을 모을때다.

먼저 남북간의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그것이 햇볕이든 삭풍이든 아니면 둘을 섞은 것이든 우리의 평화와 안녕을 위한 수단은 모두 발휘해야만 한다.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정신무장과 국가무장은 최소한의 존립근거다. 국무총리와 국방장관, 합참의장이 격(格)에 안맞고 관례가 아니어서 순국장병의 영결식에 불참하는, 이런 정신상태부터 고쳐야만 한다.

우리 내부의 긴장요인도 없애야 한다. 국민을 가르는 붕당정치, 지역감정, 빈부격차, 교육격차를 해소하는 정치개혁, 경제개혁, 교육개혁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서로를 분열시키는 몰염치, 무질서, 연고주의, 극단적 개인주의 등 반사회적 관행을 훌훌 벗어내야 한다. 이같은 개혁과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구태를 답습하며 미래를 꿈꾸지 않는 대한민국의 매일 매일에 우리는 좌절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6월의 신화'가 집단적 백일몽으로 전락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이제 영웅들의 6월은 끝났고, 보통사람들의 7월이 시작됐다. 희망과 긴장의 불안한 순환을 끊고 희망만을 온전히 거두려는 의지를 되새기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 '대~한민국!' <윤인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