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7월17일 오늘을 '제법절(制法節)'이 아닌 '제헌절(制憲節)'이라 하는가. 그것은 다른 보통 법이 아닌 '헌법'을 만든 날이기 때문이다. 무슨 소린가. 민법, 형법, 상법, 기타 법은 모두 '법(法)'자가 하나뿐이지만 '헌법'만은 '법 헌(憲)', '법 법(法)'자로 '법'을 뜻하는 글자가 둘이다. 헌법이야말로 법 중의 법, 법의 법이며 으뜸 법, 기본법, 뿌리 법이기 때문이고 그 나라의 모든 법을 대표하는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미안하지만 제헌절 아침 문간에, 베란다 창틀에 내걸린 태극기를 향해 '열중(列中) 쉬엇'이 아닌 '독중(獨中) 쉬엇→차렷' 거수경례를 올려붙일 마음이 도무지 내키지 않는다. 제헌이래 툭하면 뜯어고치고 주물러 누더기 헌법을 만들어온 섣부른 농단도 농단이지만 무엇보다도 저 법의 여신상 양손에 들려 있는 칼과 저울대 양쪽을 심각하게 모독하고 있다고 사려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법의 형평성 실조(失調)는 물론, 서슬 푸른 법의 칼날도 제대로 정의롭게, 그럴싸한 각도로 비껴 내리치지 못해왔다는 절실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언필칭 헌정사(憲政史)였다. 그러나 법이 다스린 '헌정사'라기보다는 사람이 법을 다스린 '인정사(人政史)'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은 숱한 외압에 시달렸고 외풍 눈치보기에 허둥거렸다. 도무지 권세의 시녀용 앞치마를 벗을 날이 없었다. 그런 법의 좌표는 오늘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순자(荀子)의 말씀에 '유치인무치법(有治人無治法)'이라 했다. '다스리는 사람은 있어도 다스리는 법은 없다'는 말이다. 사람을 다스리는 법도 결국은 사람에게 달렸다는 뜻이다. 그래서 “짐이 명하노라”는 제왕적 권도(權度) 시절의 법이나 오늘의 법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며 입법자인 솔론(Solon)은 법망을 거미줄에 비유했다. 법이란 벌레 따위 미물이나 잡는 거미줄, 약자에게만 가혹한 악명 높은 그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만든 법이 끗발 센 귀족들도 뚫고 나가지 못할 이른바 '쇠 그물 법'이라는 것이었다. 한데 솔론이든 누구든, 어느 시대 어느 곳의 법을 쥐고 흔드는 사법 종사자들이든 명심할 명언이 바로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다. 비리는 법을 이기지 못하고, 법은 권세 앞에 달달 떨며 오금을 펴지 못하지만, 그런 권세도 결국은 하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하늘법'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늘법이란 곧 양심법이고 자연법이다. “내가 살인을 했으니 죽음을 달라”고 청하는 살인자의 가슴 속 법이 즉 양심법이고 숨겨온 죄만큼, 저지른 죄만큼 벌을 받겠다는 당연한 양심법이 곧 하늘법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따위가 최악의 법이라면 최고의 자연법은 바로 양심법과 하늘법이다. 그러나 세속은 법 없이도 살 사람 못지 않게 법 없이는 안될 사람 또한 많은 '법'이다. 먼 양심법, 자연법보다는 실정법…성문법을 가까이 둬야 하는 까닭도 그런 데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실정법은 저 법의 여신상 저울대가 기울지 않도록 공평무사해야 하고 외압에 뼈와 기를 펴지 못하는 법이 돼서는 안된다.
억지 경찰, 변호 의무에 투철치 못한 변호사, 철두철미한 심리 없는 판결 과정이야말로 가장 뻔뻔스레 인권을 짓밟는 제도적인 죄악이라는 이른바 '영국의 수치' 사건은 92년 2월과 5월에 일어났다. 종신형으로 16년간 복역중인 39세 죄수에게 무죄가 확정되고 18년 옥살이의 43세 여인도 무죄가 확정된 것이다. 일본에서도 옥고 34년 8개월의 사형수가 89년 1월 무죄로 석방됐고 무려 48년만인 94년 3월 누명을 벗은 죄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를 구형하고 판결한 검사 판사는 어찌해야 하는가. 당장 34년, 48년간의 감방살이를 시작해야 마땅하다. 아니, 오판으로 사형 집행까지 마친 죄수가 무죄라면 또 어찌할 것인가. 법복 걸친 그대로 곧장 자살을 못한다면 적어도 그만한 대가의 속죄를 해야 마땅하다. 사법 종사자든 그 위에 군림하는 권세가든 법에 대해 오늘 하루만이라도 낮고도 겸허하게 숙고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싶다. <오동환 (논설위원)>오동환>
'制法節'이 아니고 '제헌절'인 까닭은?
입력 2002-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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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16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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