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한국정부에 대해 특정 다국적 제약사의 약품이 건강보험 급여시 불이익이 없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정국불안의 새로운 불씨가 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이태복 전보건복지부 장관이 자신의 퇴진이 이들 다국적 제약사의 로비 때문이라고 발언한데 이어 한나라당의 김홍신 의원이 관련자료를 공개함으로써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한국의 자존심과 국가 체면을 망가뜨리는 일이어서 분명 중요한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이들 주장에 가려 정작 사안의 핵심적인 문제인 건강 보험재정 적자와 그 요인의 일부인 약가문제가 소홀히 여겨지지 않을까 걱정된다.

문제의 핵심은 이태복 전 장관이 보험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다국적 제약사와 일부 대형 제약사의 의약품 가격 인하를 고수한데서 비롯됐다. 약제비는 지난 98년 2조8천여억원에서 지난해 무려 4조1천여억원으로 43%나 급등했다. 그만큼 건강보험 재정을 압박, 적자요인이 됐고 국민의 부담도 증가했다. 특히 지난해 하반기 가장 많이 팔린 상위 10개 의약품중 8개가 외국 제약사 제품이었다. 따라서 다국적 제약사 의약품 가격인하 정책은 건보재정 보호를 위해 당연히 취할수 있는 방안이었다.

정부는 지난 1999년 11월 의약품 가격 인하를 꾀하고 제약사와 의료기관간의 의약품납품 비리를 근절키 위해 의약품 실거래가 상환제를 실시했었다. 종전에는 제약회사들이 출하가격을 자율적으로 결정, 당국에 신고하면 여기에 적정 마진을 더해 약가를 고시해 왔었다. 따라서 이 제도 아래에서 의료기관이 제약회사와 협의를 통해 가장 낮은가격으로 의약품을 구매하고 고시가격과의 차액인 마진을 극대화 할수 있었다. 그러나 의약품 실거래가 상환제를 실시하고 2000년 들어 의약분업이 실시되자 의료기관과 의사들은 굳이 의약품의 저가 구입을 할 필요가 없게 됐다. 말하자면 의약품 가격결정에 수요자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게 된 것이다.

둘째는 이러한 현상이 빚어지자 의료기관과 의사들은 가격과 품질 비교에 의한 의약품 구입 또는 처방 보다는 유명제약사나 원천기술을 가진 제약사의 제품 위주로 처방전을 발급함으로써 유명 제약사 의약품 가격의 상승을 부추겼다. 환자들도 값비싼 유명제약사 제품을 선호하는 분위기다. 이와 관련 한 의약 관계자는 종전에는 일부 개업의들이 처방시 전혀 사용하지 않던 약품이 의약분업이후 처방 순위 상위에 오르는 것이 있다고 털어 놓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대형 종합병원 보다는 일반 개인의원에서 더 심하게 나타 난다는게 의료계의 지적이다.

셋째는 보통 20년으로 돼 있는 의약품의 원천기술 특허권의 시효가 끝날 경우 미국등 선진국에서는 해당 약품의 가격을 반절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관례로 돼 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특허시효 만료후의 가격 평가제도가 없는데다 의료기관의 안일한 처방으로 이같은 의약품 가격이 내릴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넷째는 의약분업 이후 의료기관들의 의약품 조제 판매이익이 없어지자 당국은 대신 이를 보상키 위해 보험수가를 인상했다. 이 때문에 건보재정은 더욱 악화됐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그 개선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일본도 지난 1997년 8월 자민 사민 신당의 선두 3당이 협의회를 열어 약가 문제를 건강보험의 가장 중요한 기둥중 하나로 판단하고 일본형 참조 가격제도의 개혁등 여야를 초월한 개선책을 마련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도 여야가 이를 행정부에만 맡겨 잘못이 있을때에만 책임을 묻고 정쟁만 일삼을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현재 일부 전문가들이 하나의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한국형 참조 가격제(효능이 같은 약품의 평균가격보다 일정수준이 넘는 부분에 대해서는 환자가 약값을 부담하는 제도)와 정기적인 약값 재평가제도를 포함, 보험약가 제도를 원점에서 다시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의료기관과 의사들이 고가의 다국적 제약사제품 대신 가격 경쟁력 있는 우수품질 의약품으로 처방하고 환자들도 한물간 외국회사 제품을 고가라는 이유로 무조건 선호하는 의식을 불식 시켜야 할 것이다. <성정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