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의 처녀작 ‘이방인’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양로원의 전보를 받고 장례를 치르러 양로원으로 간다. …어머니를 땅에 묻은 다음에는 “이젠 좀 누워서 실컷 주무실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으로 무척 기뻤다’. 지금의 독자들이야 별다른 감정변화 없이 무심히 읽어 넘길 수도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30~40년 전 한국 독자들이라면 사뭇 당혹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만 해도 산업화 도시화가 채 자리를 잡기 이전이라 우선 ‘핵가족’이라는 개념부터가 무척 낯설었다. 양로원이라는 것도 드물게 있기는 했지만 서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족은 으레 복닥대면서도 함께 모여사는 걸로 알았고, 특히 연로한 부모를 부양한다는 것은 굳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자식된 기본 도리로 알면서 살아왔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느라 고생하며 늙었으니 이제는 자식들이 이를 효(孝)로 갚아나가야 한다고 배워왔다. 하물며 자식이 버젓이 있는데도 연로한 부모를 양로원에 보낸다는 것부터가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나’로 표현되는 주인공 뫼르소는 비록 하급 샐러리맨이지만, 홀로된 어머니를 공양하지 못할 만큼 그다지 궁핍하지도 않은 젊은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를 양로원에서 돌아가시게 했다. 당시의 상식으로 뫼르소의 행위가 결코 곱게 비칠 리도 없었으려니와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도 좀처럼 이해되기 어려운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음직하다. 한편으론 뫼르소의 어머니 같은 서구사회 노인들이 한없이 불쌍해 보였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우리사회도 많이 변했다. 어느새 서구 어느 나라 못지않게 산업화 도시화를 이루면서 핵가족 현상이 일반화 되어갔고, 노인부양도 더 이상 전통적인 효사상에만 기댈 수 없는 사회로 바뀌었다. 웬만큼 사는 집안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폐 끼치기 싫다며 자진해서 실버타운을 찾는다. 한결 격이 떨어진다는 양로원시설도 곳곳에 들어찼지만, 자식들의 부양을 기대할 수 없는 노인들로 항상 부족하다. 심지어 자식들에게 버림받고 거리를 헤매는 노인들도 부지기수다. 여기에 인간의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인구는 갈수록 늘어만 간다.

지금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 인구의 7.3%인 340만명에 달하는 고령화시대를 맞았다. 게다가 유난히 빠른 고령화 속도로 2020년엔 지금의 배(倍)가 되는 14.4%의 완전 고령사회가 되리란 전망이다. 아울러 20년 후엔 노인 혼자사는 가구가 전체 가구의 9%에 달하리란 예측도 나온다. 결혼기피 만혼현상까지 겹치면서 100가구 중 무려 22가구가 ‘나 홀로 가구'가 되고, 그중 41%는 65세 이상 노인가구가 될 것이라 한다. 이를 풀어서 계산하면 100가구 중 9가구는 노인가구가 되는 셈이다.

노인들 ‘나 홀로 가구’의 급증은 어쩌면 인구구조나 가족형태가 우리를 한참 앞질러간 선진국들을 닮아가는 걸 의미한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중대한 사회변화에 대처하는 방식도 예전과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다지 낙관적이지를 못하다. 지금도 고령화 시대지만, 노인복지예산은 전체의 0.35%에 불과할 정도로 공적부양체계는 미흡하기 그지없다. 평균수명이 길어져 노인 인구가 계속 늘어나도 핵가족화와 더불어 가족부양 체계는 벌써부터 허물어져 갔고, 여기에 사회와 국가의 부양체계마저 이처럼 걸음마 수준이다.

향후 20년은 결코 긴 세월이 아니다. 언제까지 맥놓고 있을 여유가 그렇게 많지 않다. 국가와 사회가 함께 서둘러 지혜를 모아야할 때다. 물론 능력있고 현명한 분들이 적지 않다 보니 보다 그럴듯한 대책들이 여기 저기서 제시되고 있기는 하다. 노인복지예산을 대폭 늘려야 한다든지, 노인들이 일거리를 잃지 않도록 하자든지, 재가복지서비스를 한층 확충하자는 등등…. 그밖에도 갖가지 안들이 많지만 필자는 여기에 꼭 한가지만 당부하고 싶다.

헐벗고 굶주렸던 이 나라를 이만큼이라도 잘사는 나라로 일궈낸 주역들이 바로 오늘의 노인들이고, 또 내일의 노인들이란 사실만은 반드시 마음에 새긴 뒤 대책을 세워도 세우자고. <박건영(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