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란 소설은 그 첫 귀절이 매우 이채롭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작자가 무슨 잠언 비슷한 말을 늘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 대개 그 행복한 사정이 엇비슷하다. 그러나 불행한 이들은 그 불행의 사유가 저마다 다 다르다.” 이렇게 서두를 떼어 놓고나서 비로소 주인공 ‘안나’의 긴 인생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톨스토이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아닌게아니라 사람들이 감촉하는 불행의 ‘얼굴’모습은 천태만상일 듯싶다. 역시 인간이 감정의 동물인 탓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고 많은 불만의 감정들을 말하자면 중도적(中道的) 입장에서 통합해 조정할 만한 방도란 없을 것인가. 요즘 대통령선거 날짜가 아직 많이 남아 있음에도 권력투쟁에 몰두해 있는 정당들의 모습이 이건 꼭 거의 구토를 일으키게 할 지경으로까지 치달아, 문득 이런 사회통합론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직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박정희(朴正熙)정권 전반의 시절에 ‘중도통합론’이란 정치적 기치(旗幟)를 쳐들고 나온 야당 중진 정치인이 있었다. 그는 이내 이른바 ‘사쿠라’로 몰렸다. 나이 젊은 독자들에게 풀이한다면 ‘사쿠라’란 금방 만개하였다가 곧 시들어버리는 벚꽃의 일본 말로, 요컨대 사이비적(似而非的) 인간유형에게 들이대는 모욕적 은어였다 할 만하다. 나중 입증되었지만 그 야당 정치인은 딱히 ‘사이비’행각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 ‘중도통합론’이란 것 때문에 그의 정치적 운명은 줄곧 조락(凋落)의 길을 밟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중도’란 아예 회색지대의 것이고, 또 기회주의적일 뿐이란 말인가. 단언하거니와 그런 건 아니라고 강조해 두고 싶다.

되풀이해서 말하자면 ‘중도’의 모색은 인류에게 주어진 숙명이라 할 만하다. 왼 쪽과 오른 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만나 보기 위해선 일단 ‘가운데’로 서로 이동해 와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접점에서 각자의 보따리들을 풀어 놓고 통합을 시도해 보는 것이 옳다. 따지고 보면 인류에게 절대적 가치가 있기나 한 건가를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의 야당 정치인은 만약 그가 고의(故意)가 아니었다면 오로지 시기(時期)를 잘못 선택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할 것이다. 실수 치곤 치명적인 것이었지만…. 당시로선 ‘중도’란 것이 통할만한 환경이 전혀 아니었다. 그 무렵 공화당 정권이 영구집권의 독재체제를 완벽하게 다져가던 참이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이른바 독재 대 반독재, 또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당시의 실물정치 판도가 고착화해 있던 터수에 엉뚱한 카드를 내놓은 꼴이 되었다.

이야기를 지금으로 다시 되돌려, 나는 진정한 의미의 ‘중도통합론’이 그 실험을 시작할 때가 바야흐로 다가왔다고 생각한다. 이제 독재이니 민주이니 하는 정치구호들은 역사의 장막 뒤로 사라진지 오래이고, 또 좌파이니 우파이니 하는 이데올로기적(的) 대립도 그 예각(銳角)이 많이 무뎌진 게 사실이다. 새삼 들여다 보면, 가령 이회창(李會昌) ? 노무현(盧武鉉)후보의 정치이념들이란 게 뭘 그리 엄청나게 판이해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껏 전자가 좀 보수적 성향의 인물이라면 후자는 진보적 색채를 띠고 있다는 정도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좀 실례의 말이지만, 그들은 요즘의 백병전(白兵戰) 같은 권력투쟁의 강도(强度)를 많이 완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거야 원, 세상이 너무 소연(騷然)하여 나라가 깨질는지도 모르겠다고 한탄하는 국민들이 많은 것에 눈을 좀 돌려 보란 이야기이다.

이렇듯 험한 싸움질을 계속할 양이면 차라리 그들의 이념이란 것들을 통합할 만한 중도적 인물이라도 나와 시끄러운 세상을 평정시켰으면 하는 생각도 가져 보게 된다. 가령 위의 두 후보 경제관(經濟觀)을 다음과 같이 통합해 볼 수는 없을까를 상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이회창 후보는 분배에 앞서 성장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고, 노무현 후보는 경제적 약자(弱者)들 편에 서서 선(先)분배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각각의 추진 강도가 다소 떨어지더라도 성장과 분배의 속도 동일화란 중도적 방안도 모색될 만하다는 얘기를 나로선 첨가해 두고 싶어지는 것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를 함께 움직여 하늘을 난다지만, 아마도 양쪽 힘의 균형을 가운데 몸통에서 잡을 것이 확실하다. <김덕중 (논설위원·경원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