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야 있든 없든 미국 대통령이 퇴임 보따리를 싸 백악관을 나섰다 하면 횡재부터 만난다. 요즘 말로 대박, 왕대박을 노린 출판사들이 자서전을 써 달라, 회고록을 써 달라며 벌떼처럼 달라붙기 때문이다. 재직 때 별 볼 일 없던 카터만 해도 퇴임하자마자 회고록 출판 계약서에 서명, 계약금으로 자그마치 200만달러(약 24억원)를 챙겼다.
미국 대통령만 그런가. 흐루시초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도 만년에 구술(口述)을 통해 회고록을 썼고 전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 호네커도 '옛날이 훨씬 좋았다'는 회고록을 냈다. 대처 영국 총리가 낸 회고록 제목은 '다우닝가의 세월'이었고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의 회고록은 각각 '두 목소리로 된 회고'와 '권력의 삶'이었다. '대통령적(的) 총리'로 불렸던 나카소네(中曾根)는 '대지유정(大地有情)'을 펴냈고 고르바초프는 “통독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내용 등을 회고록에 썼다.
남아공의 만델라도 27년간의 감옥 생활을 '자유에의 긴 여정'에 담았고 35세에 이슬람 국가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된 파키스탄의 부토는 그 이전에 벌써 자서전을 썼다.
아돌프 히틀러는 어떤가. 그가 흐루시초프처럼 구술을 통해 썼다는 '나의 투쟁(Mein Kampf)'은 물경 780만라이히스마르크(RM)를 벌었다. 1RM이 5∼8달러였으니까 780만×6만 쳐도 4천680만달러, 약 560억원이다. 이 달 말 독일 국영 ARD 방송 전파를 탈 다큐멘터리 '히틀러의 재산'을 제작한 인고 헬름 감독은 말한다. “그는 자신을 인정받지 못한 천재로 여겼고 그런 자신의 콤플렉스를 달래기 위해 재산 부풀리기에도 집착했다.” 그러니까 히틀러야말로 '거물→회고록→왕대박' 공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니었나 싶다.
또 하나의 비슷한 공식은 '인기인→자서전→대박'이다. 미국 여우 캐서린 헵번과 프랑스 여우 브리지트 바르도는 약속이나 한 듯이 각각 62세에 자서전을 냈고 소피아 로렌은 55세에, 커크 더글러스는 44세에 내는 등 할리우드 스타 치고 자서전을 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회갑 때인 95년에 출간한 루치아노 파바로티, 33세인 91년에 낸 마돈나 등 가수들도 앞을 다툰다.
그런데 좀 그렇고 매우 그런 건 유명인, 인기인의 날개에 올라탄 그 가족들의 자서전 붐이다. 빌 클린턴의 모친 켈리는 며느리 힐러리가 너무 총명·냉철해 질투를 느꼈다고 자서전에 썼고 '낸시 레이건, 허가받지 않은 전기'라는 낸시의 자서전은 출간되자마자 서점 문이 부서질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애견 밀리의 눈을 빌려 쓴 바버라 부시의 '밀리의 책'이다. 자그마치 89만달러(약 9억6천만원)를 개가 벌어들였다는 것이다.
물론 출판사의 꼬드김 탓도 탓이겠지만 우리의 월드컵 스타 홍명보, 송종국, 이천수 등이 회고록, 자서전을 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그렇다. 그 동안 다 좋았다. 월드컵 4강 스타의 날개를 달고 네덜란드로, 어디로 진출하는 것도 좋고 광고 모델, 패션 모델이 되는 것도 좋다. 기념우표 인물 데뷔도 찬성이고 김남일의 축구화가 650만원에 경매된 것도 짝짝짝 손뼉을 치고 싶다. 한데 자서전, 회고록만은 영 그렇고 영 안됐다. 마돈나처럼 30대에, 그보다도 이른 20대에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마치 취침 전에 쓸 일기를 아침 8시, 9시에 쓰는 것과 같지 않은가.
일본인들은 회고록을 '지분시(自分史)'라고 한다. 한 개인, 자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20∼30대에 회고록을 쓴다면 거기 담을 삶이 뭐가 있겠는가. 흔한 예로 자화자찬, 호도, 분식, 과장, 왜곡 등도 문제다. 그럼 어떤 사람들이 써야 하는가. 딱 두 사람만 든다면 드골과 처칠이다. 드골은 위대한 정치가 못지 않게 문호로도 존경심을 한 몸에 받은 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회고록(memoirs)이 최근 프랑스 명문 출판사 갈리마르가 펴내는 최고 권위의 '플레이야드 총서'에 발자크, 모파상, 지드, 프루스트, 생텍쥐페리, 말로 등의 작품과 나란히 채택될 정도다. 그리고 처칠이야 그의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까지 받지 않았던가. <오동환 (논설위원)>오동환>
월드컵 스타의 회고록
입력 2002-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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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20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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