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전국이 태풍 '루사'가 몰고 온 폭우에 흠뻑 젖고 특히 영동과 경남 일대는 유례없는 극심한 물난리를 겪었지만 한가위 풍경은 여전하다. 지난주부터 주말과 휴일이면 성묘길이 몰리는 차들로 붐비고 있다. 다음주에는 여느해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대이동'이 벌어질 것이다. 한쪽에서는 수재민들의 비통함과 분노·좌절이 있지만 보름달은 어김없이 떠 오를 것이다.

겨레의 큰 명절인 추석은 어느 명절보다 풍성하고 넉넉한 여유를 주는 날로 꼽힌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지만 올해는 이런 소리를 차마 입에 담지 못하게 됐다. 태풍 '루사'가 남기고 간 상처와 고통이 너무 크다. 그러지 않아도 최근 들어 명절의 즐거움과 푸근함 뒤에는 알게 모르게 명절 스트레스를 겪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9월 추석을 앞두고 한국갤럽이 여론조사를 한 결과 “추석이 즐겁다”고 응답한 사람이 60%, “즐겁지 않다”고 한 응답자는 40%로 나타났다. 최근 한 신문이 우리나라 가정에서 고부간 모두가 심각한 '명절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고 분석, 보도한 내용은 충격적이다.

추석 명절이 있는 9월을 싫어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직장 다니는 며느리가 추석 전날 회사 당직을 도맡아 하는가 하면 추석때마다 남편과 해외여행을 떠난다는 시어머니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명절 기피증이 확산되고 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태풍마저 한반도를 강타했으니 올 추석 분위기는 어느해 보다 울적하게 됐다.

막대한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을 입은 수재민들에게 추석 차례와 송편 빚는 일은 옛날 얘기가 됐다. 집이고 세간살이고 모두 물에 떠내려가고 잠자리마저 여의치 않은 이재민들에게 한가위 보름달이 제대로 보일리가 없을 것이다. 더욱 망극한 일은 조상이나 부모님 묘소가 폭우로 유실된 경우가 적지 않다니 성묘할 곳마저 잃은 이들의 비통한 심정을 달래줄 것이 무엇인가.

그러나 '루사'가 우리에게 고통과 슬픔만 준 것은 아니다. '루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주기도 했다. 태풍 일과(一過)후 남겨진 막심한 피해는 우리에게 자연은 눈가림 건설과 부실공사를 봐주는 법이 없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엉터리 토목공사로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연은 속일 수 없다는 점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루사'의 피해가 컸던 것은 제방붕괴와 도로 절개지 붕괴, 주요 철도교량과 노선 유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침수와 산사태, 매몰사고로 인명피해가 컸다. 누수현상이나 균열이 생긴 제방을 방치한 곳이 많았고 지난해 안전진단 결과 '양호' 판정을 받은 철도 교량들이 대부분 끊겼다. 무너진 도로 절개지는 토질이나 배수구조를 무시하고 엉뚱한 곳에 배수시설을 만들었고 경사도 너무 가파른 곳이 많았다.

자연을 무시하고 자연환경을 파괴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기상이변 자체가 인간의 자연훼손과 자원낭비에 따른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태풍 '루사'의 피해는 기상이변 말고도 대부분 공사에 기본원칙을 무시하고 기상조건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사전대비에 소홀히 한 것이 피해를 더 크게 했다. 더구나 태풍에 따른 홍수나 침수는 해마다 되풀이 되는 연례행사처럼 됐는데도 이를 외면하고 방심한 탓으로 더 큰 화를 자초한 셈이 아닌가.

기상이변을 예측할 수 없다지만 천재지변에 인재(人災)까지 겹치게 하는 무책임과 무성의는 없어져야 한다. 건설분야에 일하는 사람들, 특히 토목공사를 기획·설계·시공·감리하는 분야의 담당자들은 이번 추석 연휴때 '루사'의 교훈을 깊이 생각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내년에도 태풍은 또 우리나라에 불어 닥칠 것이다. <구건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