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동토(凍土)'엔 두 가지 뜻이 있다. 지리적인 동토와 이데올로기적인 동토다. 전자가 에스키모의 땅 북극권의 그린란드와 바로 엊그제 높이 100m의 거대한 빙하가 무너져 110명이나 묻혀버린 북 오세티아 공화국의 카프카스 산맥을 포함한 러시아 땅 시베리아, 그리고 '위대한 대륙'을 뜻하는 '알예스카(Alyeska)'에서 유래한 북미 대륙 마지막 변경(Last Frontier) 알래스카와 이름 자체가 동토인 아이슬란드 등을 떠올리게 한다면 후자, 즉 이데올로기적인 동토는 어디였던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선풍이 일기 전의 철의 장막 소비에트 연방과 죽의 장막 중공 대륙이 그 곳이었고 브란덴부르크 장벽이 무너지기 전의 동독 땅과 '프라하의 봄' '부다페스트의 봄'바람이 불기 전의 동구 땅 거기였다. 그런데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동토는 '…였다'는 과거 시제 그대로 80년대 끝자락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개혁과 개방, 노보에미슐레니(新思考), 데모크라티자티아(민주화)에 철철 녹아 도도한 세계화 물결에 합류해버렸다. 그런데도 지구상에 유독 한 군데만은 '동토였다'는 과거 시제를 거부하는 현재진행형이 아닌가.
'동토의 왕국'은 언젠가의 TV 드라마 제목이었다. 한데 그 '동토의 왕국' 밑그림과 프로파일 묘사가 아직도 그대로다 싶은 우리의 북녘 땅이 드디어 녹기 시작했다는 것인가. 미국도 찬동하는 '햇볕정책'과 일인들도 긍정적인 '태양정책'이 드디어 마지막 이데올로기적인 동토를 철철 녹이는 상승 온도가 됐다는 것인가.
남북의 혈맥인 철도와 도로의 접합수술이 군부의 마취제로 시작됐고 KBS 교향악단이 평양 무대에 서고 앉아 사라사테의 '치고이네르바이젠' 그 집시 풍의 선율이 장영주양의 바이올린으로 자지러지는가 하면 고이즈미(小泉) 일본 총리를 불러들여 그 '위대한' 머리를 조아린 채 일본인 납치를 사과했다. 나진·선봉 지구에 이어 신의주를 홍콩식 독립 특구로 개방한다고 선언했고 핵사찰도 수용하겠노라고 고이즈미 편에 유화 제스처를 전파했다.
과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명 그대로 인민 모두가 화목한 '인민공화국'으로 변하고 아침 햇살도 해맑은 '조선(朝鮮)민주주의'를 지향하려는 것인가. 그래서 지상 유일의 '동토의 왕국'을 '해토(解土)의 천국'으로 만들려 함인가.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는 회의의 시각이 많다. '라디오프레스'가 전하는 지난 8월24일 조선중앙방송 보도가 어이가 없다. “김정일 총서기의 러시아 방문중인 22일 북한 군부대 부근 소나무 숲의 백로 약 200마리가 비래해 조선반도의 형상을 그려 보인 불가사의한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또한 “백로 떼는 머리를 러시아 극동 방향을 향해 북한의 국화인 목련을 그려 보이기도 했다”는 게 아닌가. “94년 8월29일 서울 하늘에 김정일을 상징하는 장수별이 나타났다”는 그 방송 보도의 맥을 잇는 '신화'다.
북·일 정상회담이 열린 이튿날 아침 평양 고려호텔 앞 지하철역에서 나오는 30대 남성에게 일본 기자가 물었다. 그러나 아리모토(有本) 등 일본인 납치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고 했다. 조선중앙TV의 17일 오후 8시 뉴스도, 18일 아침 7시 뉴스도 김위원장이 납치 문제에 사과했다는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다. 노동신문도 17일 1면 머리 기사에서 수뇌회담은 '세계 정치사에 특필할 일'이라고 '특필'했지만 김기남(金己男) 노동당 서기, 김용삼(金容三) 철도청장 등 4인의 담화 어디에서도 납치와 사과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북녘 땅엔 좀체로 녹기 어려운 고체 체제가 있다. '커튼 콜'은 했어도 그러나 장영주의 바이올린 선율에도 청중의 대부분은 돌부처였고 차디찬 데드마스크를 방불케 했다. 그런 북한에 대한 미 국방장관의 핵 보유국 시각엔 변함이 없고 20일의 안보전략 발표에서도 불량국가(rogue state)관에는 차도가 없다. 일본 여론도 빙점을 향해 있고 납치 공작선에 대해선 배상까지 요구할 참이다. 우리에겐 어떤가. 도대체 언제쯤 가서야 남침과 그 많은 사태, 미귀환 납북자 등에 대해 허심탄회 사과할 것인가. 다만 보다 강한 햇볕만 계속 쏟아지길 바라는 것인가. <오동환 (논설위원)>오동환>
마지막 '凍土의 왕국'은 녹고있는가?
입력 2002-09-24 00:00
지면 아이콘
지면
ⓘ
2002-09-24 0면
-
글자크기 설정
글자크기 설정 시 다른 기사의 본문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가
- 가
- 가
- 가
-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