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나의 중대한 결심을 국민 여러분 앞에 밝히는 바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선언은 당분간 헌법 일부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비상조치’로서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 비상국무회의 구성’을 밝히면서 끝을 맺었다. 30년 전인 1972년 10월17일 저녁의 일이다. 곧바로 비상계엄령이 선포됐고 모든 정치집회가 금지되었다. 열흘 뒤인 10월27일 비상국무회의는 새로운 헌법개정안을 의결했고, 이 새 헌법(유신헌법)은 11월21일 국민투표에 붙여져 91.9%의 투표율과 91%의 찬성률을 기록했다.
유신헙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늘리고 중임제한을 없앴으며, 대통령 선거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체육관 선거로 대체했다. 게다가 대통령은 긴급조치권을 행사할 수 있고, 국회의원 3분의1을 지명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까지 갖게 했다. 전통적인 입법 사법 행정의 3권분립체제가 졸지에 무너져 내렸음은 물론이다. 특히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중심축이어야 할 국회는 아예 손과 발이 완전히 묶인 꼴이 되고 말았다. 정원 3분의1을 허수아비로 만든데다 입법권 예산심의권과 함께 국회의 고유한 3대 권한중 하나로 불리던 국정감사권마저 빼앗겼기 때문이다.
국회가 잃었던 권한과 기능, 특히 국정감사권을 되찾기까지엔 무려 16년이란 긴 세월을 참고 기다려야 했다. 한국 정치의 암흑기라는 유신시대가 종말을 고하고도, 이어 등장한 신군부의 독재정치까지 한차례 더 겪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국회 스스로의 힘이라기보다는 오로지 국민의 힘에 의해서였다. 1987년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났던 6월 민주항쟁 승리의 열매였던 것이다.
16년만에 부활된 국정감사가 올해로 14년째를 맞으며 ‘국민의 정부’ 마지막 감사 20일간을 모두 마쳤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변질되기 시작한 국감이 급기야 올해는 아예 ‘한건주의 정치쇼’ ‘사상 최악의 국감’이었다는 혹평을 받기에 이르렀다. 12월 대선을 의식한 각 당의 선거전략과 맞물리면서 시종 폭로전과 정치공세에 매달리다 보니, 심지어 육탄전까지 벌이는 ‘저질 정치쇼’로 일관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민생분야 등을 중심으로한 행정부 감시라는 본래의 취지 따윈 비집고 들어설 틈도 없었다. 정무위 법사위 재경위 국방위 등 어느 상위라 할 것도 없이 하나같이 ‘병풍’ ‘대북 지원설’ 등을 둘러싼 정쟁으로 지새웠지만, 어느 것 하나 속시원히 풀린 것도 없다. 오죽하면 ‘정쟁으로 시작해 정쟁으로 끝난 국감’ ‘직무유기 국감’이란 게 시민단체들이 붙여준 이번 국감의 명예로운(?) 이름이다. 긴 세월 항쟁 끝에 국민들이 힘을 모아 어렵사리 되찾아준 고유 권한을 정작 국회는 이렇게 스스로 저버렸다.
‘국감은 주요 국정분야의 재원동원 및 사용과정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차기 연도 예산심의 과정에 투입하려는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다. 또한 주요 정책의 방향과 성과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통하여, 공론의 장에서 개선방향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국감은 3권분립 원칙과 행정부에 대한 의회의 감시라는 국회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국감에 대한 교과서적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보지만, 괜히 부질없다는 생각부터 앞선다.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이 그 정도 기본도 모르고 직무유기를 했을 리는 없겠기 때문이다.
한편에선 감사방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꽤 강력히 제기되는 모양이다. 감사과정에서 국민의 참여를 강화하고, 감사결과에 대해서 국민에게 알릴 수 있는 방안이 확대돼야 한다는 등등…. 얼핏 수긍이 가긴 한다. 하지만 감사방식이 아무리 좋아진들 의원들 스스로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런 와중에도 몇몇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의원들이 있었다니 그게 차라리 조금 위안이 될지 모르겠다. 그런 의원들이 하나 둘 늘다 보면 차츰 나아질 날도 있을테니까. <박건영 (논설위원)>박건영>
변질된 국감
입력 2002-10-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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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0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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