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는 TV 드라마 ‘야인시대’를 보면 김두한의 할머니가 손자 김두한을 몹시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이 놈아! 네 아비는 천하를 호령하는 독립군 사령관이었느니라. 그런데 네놈은 뭐 거리의 건달패가 됐다구? 내 눈 앞에서 썩 없어지지 못할까! 네놈은 호랑이 새끼가 아니니라!” 호랑이 아버지 김좌진 장군의 아들답게 호랑이 새끼가 되지 못했음을 꾸짖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 김두한의 할머니가 ‘호랑이 아비에 개 아들은 없다’는 뜻의 ‘호부무견자(虎父無犬子)’라는 문자까지 써가며 그렇게 호통을 쳤더라면 그 서릿발 위엄이 얼마나 더 유식해 보였을까.

아버지와 아들의 우생학적 관계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그 아비에 그 아들로 훌륭한(虎父虎子) 관계와 둘째, 아비는 훌륭한데 아들은 그렇지 못한(虎父犬子) 관계, 셋째, 아비는 못났는데 아들은 잘난(犬父虎子) 경우, 넷째, 아비도 아들도 지지리 못난(犬父犬子)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김두한의 할머니가 손자를 호통친 김두한 부자 관계는 두번째 유형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 조폭 두목 김두한은 나중에 종로 기생들의 투표에 실려 국회의원까지 당선됐고 의사당 오물 살포 사건으로 더더욱 유명해졌으니 ‘호부견자’가 아닌 ‘호부호자’로 승격하면서 역시 ‘호랑이 아비에 개 아들은 없다’는 것을 할머니 영전에 약여(躍如)히 증명해 보였다고나 할까.

한데 우리 현대사의 정치 지도자들에겐 뛰어난 ‘호부호자’의 본보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세종대왕보다도, 단군이래 어느 군주보다도 위대하다는 '근대화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부터가 어떤가. 감옥을 뒷간 드나들듯하는 마약 중독자 아들을 그는 지하에서 어찌 차마 눈을 돌려 외면하고 있을 것인가. “너만 감옥에 가기냐” 식으로 뒤따랐던 YS의 아들은 어떻고 “너희들만 큰 집에 들어가서야 쓰겠느냐”는 듯 서두른 DJ의 아들들은 또 어떤가. HC(昌)의 대통령 지망 재수에 일조(一助)를 가한 체중 미달의 수수깡 같은 아들은 또 어느 유형의 우생학적 부자 관계에 해당하는 것인가. ‘호부무견자’라는 말을 무색케 하다못해 국어사전에서 끄집어내 패대기치려는 듯한 모션들이 아닌가.

그럼 후반전 10분 전까지 ‘경제 대통령’으로 뛰다가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었던지 종료 휘슬 때까지 ‘정치 대통령’으로 뛰기를 열망했던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기라도 하려는’ 듯 후반전 시작부터 아버지의 교체 멤버로 대선 그라운드에 뛰어든 정몽준의 경우는 사뭇 다른가. ‘정치 대통령’에 떨어진다 해도 여전히 ‘경제 대통령’ 격인 ‘호랑이 아들’이요 붙으면 더더욱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용맹한 ‘효자 호자(虎子)’가 되는 것인가. 그는 아마 12년간 대를 이어 후세인의 목 조르기에 나서는 부시 대통령 부자나 칠레의 몬탈바 부자 대통령, 콜롬비아의 파스트라나 부자 대통령을 가장 모범적인 ‘호부무견자’ 형으로 사숙(私淑)과 경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그렇게 대를 이은 대통령 부자나 대통령 후보 부자만이 대표적인 ‘호부무견자’ 형은 아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를 썩 닮고 몹시 닮아 아버지의 길만을 뒤따르는 아버지 형 ‘호자’만이 호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잘난 호자, 훌륭한 ‘호랑이 아들’들도 얼마나 흔한가. 조조의 아들 조식(曹植)은 그야말로 수용산출(水湧山出), 물줄기가 솟구치고 산줄기가 치솟는 듯 좔좔 쏟아내는 대 문장가에다 시인이었다. 일곱 발짝 뗄 동안 시 한 수를 짓는다는 ‘칠보재(七步才)’라는 말도 그에게서 비롯됐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들 엘리엇은 베스트셀러 작가였고 흐루시초프의 아들 세르게이는 미국 명문 브라운대 교수였다.

아니, 꼭 그렇게 성공한 ‘호랑이 아들’이 되는 것만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호랑이 덩치에는 비교가 안되는 고양이 모습이면 어떻고 아버지 용못(龍沼)에서 나온 이무기도 아닌 뱀장어나 미꾸라지 모습이면 어떤가. 착하고 정직한 고양이면 그만이고 법과 원칙을 존중, 파울(반칙) 안하고 거짓말 모르는 뱀장어, 마약 중독 안되고 감옥 안가는 미꾸라지면 그만 아닌가. <吳東煥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