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관리’라면 으레 당쟁이나 벌이고 가렴주구를 일삼던 모습들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들을 뽑던 과정은 뜻밖에도 사뭇 엄격하고 합리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우선 관리 입문부터가 지금의 고시 보다 더 어려웠다던 과거시험을 거쳐야 했다. 드문 예외로 음서라 하여 부친이나 조부가 고위관직을 역임하면 그 자손을 관직에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경우 올라갈 수 있는 관품이 한정돼 있어 당상관이 되자면 다시 과거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단 과거에 합격하면 시험 성적순대로 6품에서 9품까지 관직을 받았다. 그런데 제아무리 탁월한 인물도 품계를 건너뛰거나 무시하고 승진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특히 벼슬의 꽃이라던 정승을 뽑던 과정을 보면 얼마나 신중하고 합리적이었나를 거듭 깨닫게 해준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 중 한 자리가 비면 왕은 다른 두 정승에게 복상(卜相)을 명한다. 그러면 두 정승은 세사람의 후보자를 물색, 왕에게 추천한다. 그런데 그 후보에 오르는 일부터가 무척 까다로웠다. 첫째, 정 1품이어야 했다. 아무리 실력 및 가문과 혈통이 좋아도 이 품계를 무시 못한다. 둘째, 반드시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거친 인물이어야 했다. 셋째, 그의 정치력 행정력 학문 인품에 대한 왕과 세간의 평가가 사뭇 중요시된다. 그리고 왕은 이 모든 사항을 종합해서 후보자 셋 중 하나에 낙점을 찍는다. 정승이 아닌 나머지 관리 승진임용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야 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그 시대 관리는 입문부터 어려운데다 학식과 경험 인품 모두를 두루 갖춰야 오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늘상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라던 김영삼 전대통령은 인사에서 유난히 보안을 중시했다. 그래서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거의 아무도 모르게 선정작업이 진행되곤 했다. 그러다 보니 능력이나 도덕성 등이 사전에 철저히 검증되기 어려웠고, 일단 등용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바꾸는 식의 인사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단 며칠 아니면 몇달만에 경질되는 인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탓인지 문민정부 5년 동안 개각만 무려 25회나 단행됐다. 장관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5년내내 재임했던 공보처장관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11.3개월이었다.

이같은 현상은 국민의 정부에 들어서 한층 더 심화됐다. 심지어 불과 43시간만에 퇴진하는 장관도 나왔을 정도다. 지난 7·11 개각까지만 해도 작년 1월 신설된 여성부를 제외한 18개 부처 장관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불과 10.6개월에 그치고 있다. 이는 5공의 18.3개월, 6공의 13.7개월은 물론이고 가장 짧았다는 문민정부의 11.3개월에도 훨씬 못미치는 기록이다.

잦은 장관 교체는 일관성 있는 정책 수립과 집행을 어렵게 만들 수밖에 없다. 소신껏 자신의 정책을 펼쳐보기도 전, 거의가 입안단계에서 또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여부도 느끼기 전에 손을 놓아야하는 경우가 흔히 생기기 때문이다. 소신을 펼치기는 커녕 부처 업무파악도 미처 못한 채 퇴진하는 경우도 적지않다. 그 뿐 아니다. 새 장관은 으레 자신과 손발이 잘 맞는 인물들과 일하기를 원하게 되고, 이는 결국 일부나마 부처 공무원들의 인사를 몰고오게 마련이다. 이른바 인사의 도미노 현상을 낳게되고, 그런 게 잦다보면 그 또한 용두사미식 정책수립과 집행을 부채질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잦은 장관 교체에 따라 이리 저리 자리를 옮겨야 하는 부처 공무원들이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업무야 어찌 바뀌든 우선은 보신을 위해서라도 무사안일과 복지부동에 젖게 되는 건 아닌지. 어차피 잦은 자리 이동으로 새로운 업무파악마저 결코 쉽지는 않을테니까. 숱한 공직자들의 해바라기성 줄대기, 이로 인한 공직사회의 기강해이가 심화되는 것 또한 이같은 풍토에서 비롯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국민의 정부는 기껏해야 3개월여 남았을 뿐이다. 그래서 안타까운대로 내년 2월 새로 들어설 정부에게나 바랄 수밖에 없다.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인사정책만큼은 좀 쇄신해 달라고.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최소한 조선시대 정승을 뽑던 일이라도 한번쯤 떠올려 줄 것을…. <박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