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아스팔트 위를 뒹굴고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요즘 여지 없이 ‘국화빵'이 등장한다. 60년대 초등학교 시절, 퇴근길 아버지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때였다. 땅거미 진지는 오랜데도 아버지는 아직 오시지 않아 삐걱거리는 대문 소리에 연방 귀를 쫑긋 세웠다. 급하면 솜을 넣어 누빈 두툼한 옷을 걸쳐 입고는 형과 함께 버스 정거장으로 달려나가 보기도 했다. 아버지는 이내 식을까봐 국화빵 봉지를 꼭 껴안고 들어오신 터라 양복 저고리가 아직도 따뜻했다. 국화빵처럼 닮은 아들 넷에게 아버지는 봉지를 터뜨려 벌려 놓으시며 손도 대지 않고 먹는데만 열심인 우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셨다. 어린 네형제는 그저 '어른들은 국화빵을 싫어하시는구나'하고만 여겼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그때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됐지만.
국화빵에 대한 추억은 또 있다. 85년으로 기억되는데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정문에서 국화빵을 팔던 김모씨가 단골 손님인 숙대생과 결혼해 ‘국화빵 장수와 여대생 부부’로 화제가 됐었다. 초등학교 중퇴가 최종학력인 그가 일류 여대생과 결혼한 사실이 당시로서는 장안의 화젯거리로 손색이 없었다. 여대생의 숫자가 많지않던 시절이었으니까 더욱 관심 끄는 뉴스였음이 분명했다. 국화빵 인생이 그에게 선사한 최대의 선물을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이라고 하는 김씨는 지금도 감자탕집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올초에는 김진곤(66) 할아버지가 전남 여수의 한 시장 입구에서 13년간 붕어빵 장사를 하면서 모은 돈 1천500만원을 불우이웃 돕기에 내놓아 행자부로부터 ‘밝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11인'에 뽑혀 국민포장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서민들의 마음 속 향수인 그 옛날 국화빵, 붕어빵의 개념은 서민들의 사랑의 상징처럼 다가와 당시의 문화나 경제 상황을 대변해 주던 것이었다. 지금은 빙과회사에서 복고풍의 마케팅으로 옛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똑같은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만들어내 아이들로부터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다. 종이봉지에 담긴 눈물 자국을 아는 기성 세대들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와닿을지 자못 궁금하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던가.
서민의 애환이 많이 서려 있는 빵이어서 그런지 그동안 문학이나 노래 유머 등에서 다양하게 비유되기도 한다. 획일화된 교육을 지적할 때 ‘국화빵, 붕어빵'처럼 똑같이 찍어낸다는 등, 판에 박은 듯한 정책이나 물건·사람을 가리킬 때 자주 동원된다. 또 정치가 예나 지금이나 국화빵처럼 똑같아 변한게 없다느니 하기도 한다. 얼마 전 현 정권 주변에서 활동하다가 비리 혐의로 구속된 최규선씨가 ‘붕어빵엔 왜 ‘앙꼬’가 없는가'라는 자서전을 준비중이라 해서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 홍모 청와대수석비서관이 구속되면서 나는 ‘깃털에 불과하다'고 말한 것이나 붕어빵처럼 똑같은 꼴이지만.
IMF 구제금융을 받은지 5년을 맞아 상황이 극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늘어나는 것이 거리의 노점이다. 며칠 전 만난 슈퍼마켓을 하는 친구는 IMF 때보다도 손님이 더 줄었다고 한숨을 늘어 놓는다. 역전이나 도심 상가 주변에는 입구를 노점상이 거의 3분의 1이나 가로막고 있다. 힘들여, 돈들여 대학에서 4년간 공부했지만 일자리가 마땅치 않아 고학력 실업자가 늘어만 간다. 취업박람회장에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Street Business'라 불리면서 생계의 한 수단으로 자리잡은 노점상들이 IMF 이후 우후죽순처럼 늘어 우리 경제 현주소의 척도처럼 되고 있어 걱정스럽기도 하다.
얼마 전 노무현씨와 정몽준씨가 대통령후보 단일화 협상을 끝내고 포장마차에서 소주로 ‘러브 샷'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이들도 국화빵이나 붕어빵의 아름다운 추억을 모를리 없는 세대들이다. 단순히 정권 획득을 목표로 97년 DJP 연합처럼 국화빵 같은 판에 박힌 정략을 되풀이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포장마차에서 비쳐진 그들의 모습이 국화빵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서민들을 위한 진솔한 행동이었기를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대다수 서민층을 행동으로 대변하고 이들과 진정 마음을 나누겠다는 다짐이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이준구 (논설위원)>이준구>
국화빵이 생각나는 계절
입력 2002-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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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26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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