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과 민주당이 TV방송연설에 출연한 찬조연설원의 신분을 놓고 도덕성 시비를 벌이고 있다. 한나라당은 민주당 노무현 후보 찬조연설원으로 나선 '자갈치 아지매'를 “친민주당 위장서민”이라고 발가벗겼다. 민주당은 한나라 이회창 후보 연설원으로 출연한 '평범한 주부'가 “한나라당 국회의원 보좌관”이라고 까발렸다. 모두 객관적인 증거들이 있는 모양인데 시비는 저들끼리 가리라고 하자. 다만 양당의 폭로로 영상미디어 정치의 '이미지 조작'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점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정당과 정치인은 기본적으로 대중을 선동한다.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다. 지지의 결과는 권력획득으로 이어진다.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그리스-로마시대부터 대의민주주의가 시스템을 갖춘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인들은 대중의 '지지 함성'이나 '지지 표'를 얻기 위해 그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이성에 호소하는 선동을 반복해왔다.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3막 2장에 실린 안토니우스의 웅변 대목은 민중선동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저의 장례식날 암살자 부르투스는 “시저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시저를 죽였다”고 열변을 토해 로마 민중의 환호를 받는다. 암살자에서 로마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어 등장한 안토니우스는 시저의 유언장을 흔들며 군중들의 시선을 고정시킨 뒤 위대한 시저의 일생을 상기시켜며 “내가 부르투스였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격분케 해 시저의 무수한 상처 하나 하나에 혀를 주어 로마의 돌까지도 일어서서 폭동을 일으킬 만큼 흥분의 소용돌이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라고 선동한다. 대중들에게 부르투스가 변설에 능한 배신자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위대한 시저가 난자당해 숨진 현실을 각인시키며 암살자들에 대한 폭동을 유도한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는 안토니우스의 연설은 순전히 셰익스피어의 창작임을 강조했지만, 로마사 전반에서 대중연설 능력은 정치인의 기본이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대중 선동을 통한 정치는 이제 낡은 유물이 됐다.
영상미디어의 은총을 받고 인터넷 세례를 받은 신세대들은 7~8년 전만 해도 선거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대중연설을 과거의 '원시적 현상'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 대신 들여앉힌 것이 'TV'와 '인터넷' 등 새로운 영상미디어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다. 문제는 시대의 추세를 인정한다 해도 영상미디어가 주도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실체는 눈여겨 봐야 한다는 얘기다. 정치와 정치인들의 실체는 사라지고 조작된 이미지만 범람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앞서 예를 든 '자갈치 아지매'와 '평범한 주부'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대통령 후보들의 이념과 정책·비전에 대한 '언어의 중계'는 생략한 채, 호프집에서 대학생과 건배하고 셔츠 차림에 기타를 든 후보들의 이미지만 반복해 노출하고 있으니 대중들은 정보가 아니라 감성적 호감에 이끌려 투표를 할 수밖에 없다.
영상미디어 선거의 천국 미국의 경우 1일 대선 후보자의 연설 보도가 68년 43.1초에서 96년 8.2초로 줄어든 반면, 후보들이 TV광고에 쏟아부은 돈은 72년 9천700만달러에서 96년 4억2천400만달러로 4배가 늘었다는 통계가 있다. 상업방송과 선거 컨설턴트가 판치는 미국 선거에서 후보들은 육성(肉聲)을 잃어버린 경주마일 뿐이다. 미국내에서 정치행위의 수단이었던 미디어가 정치주체가 되는 가치전도의 현상을 극복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쯤 되면 10만, 100만 대중 앞에 발가벗고 서서 육성만으로 승부했던 시대의 '원시성'과, 육성은 사라진 채 허상만 난무하는 영상미디어 시대의 '허구성'중 어느 것이 유해한 지 따져볼 만하다.
광장에서 유권자와 함께하는 직접민주주의는 시저 시대에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선거유세 형식의 진화는 필연적이다. 문제는 정치인과 유권자가 함께 진화하지 않으면 민의가 왜곡될 가능성은 상존한다는 점이다. 영상미디어를 통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제도적 노력의 강화와 함께 유권자들의 정치적 진화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지에 속기보다 후보자의 육성에 귀기울이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윤인수 (논설위원)>윤인수>
TV 선거의 한계와 유권자 자세
입력 2002-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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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10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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