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50대 대통령이 등장했다. 여전히 상대방에 대한 흑색선전과 비방으로 유권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는 했지만, 그래도 이번 선거는 역대 어느 선거보다 돈 안 쓰는 깨끗한 선거로 치러졌다고 평가됐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통령 선거는 새천년 들어 처음 치러진 선거답게 우리 정치사의 새로운 장을 열면서 사회 문화적 변동을 체감할 수 있는 새로운 양상도 많이 나타났다. 특히 30년 이상 이 나라 정치를 지배해왔던 ‘3김 시대’를 사실상 청산했고, 미디어 선거의 시대를 열었고, 정치인 그들만의 리그에서 시민참여축제로 발전시켰다.

당선자가 확정된 순간 대통령 후보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가족 구성원간에도 희비가 엇갈렸다.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던 어느 아버지 어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했지만 반면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자식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폈다. 20대의 62.1%, 30대의 59.3%가 압도적으로 '노짱'으로까지 지칭되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고 이회창 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각각 30%대에 머물렀다. 그동안 정치에 거의 무관심을 보였던 세대들이었지만 이들이 주도한 선거혁명이었고 노무현 당선자는 이같은 시대적 흐름을 탔다.

그동안 월드컵축제에서 보여준 자발적인 단합의 모습과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이후 촛불시위 등을 겪으며 변화를 갈망하는 이 세대들의 욕구가 분출됐다. 기성세대는 솔직히 이 흐름을 진솔하게 읽어내는데 인색했다고 사회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또한 이번 선거를 계기로 세대간의 입장차가 지나치게 드러나 한국 사회의 주요 과제로 부각됐다는 것이다. 변화와 개혁도 중요하지만 노 당선자의 첫 당선회견에서 '나를 반대했던 사람까지 포용하겠다'고 밝혔듯이 전체 국민들을 함께 아우르는 치유책이 필요한 것이다. 2030세대에 대한 짐을 생각한다거나 95%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일부 지역에 대한 부채(負債)를 의식해서도 안된다.

어떻든 이제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대통령은 선출됐다. 노 당선자는 국민들과 약속한 일들을 하나 하나 실천하고 또한 자신에게 보낸 질책들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그래서 개혁 대통령에 60대의 안정과 균형 감각을 갖춘 총리의 임명을 구상하고 내각도 안정된 팀으로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는지는 모르나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우리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대통령이 되는 일만 남았다.

논어(論語)의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장면이 문득 생각난다. 자공(子貢)이 나랏일(政事)을 묻자 공자가 답했다. “양식을 풍족히 하고, 병력을 충분히 갖추고, 백성들이 믿게 하라(足食足兵民信之矣).” 자공이 다시 물었다. “부득이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는 “병력을 버리라”고 말했다. 자공이 다시 “부득이 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버려야 합니까?”라고 묻자 “양식을 버려라. 옛날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지만, 백성들의 신뢰가 없다면 나라는 존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고 공자는 답했다. 요즘 말로 하면 국민들의 경제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고(足食), 국방을 튼튼히 하며(足兵), 국민들이 신뢰하도록 하는 것(民信)이 나랏일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국민의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존립할 수 없는(無信不立) 까닭에 비록 국민들이 가난하게 되더라도 그들의 신뢰를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정치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정치인은 돌아서면 거짓말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걸핏 하면 말을 바꾸는 정치인들을 수도 없이 보아 왔다. 그래서 비록 국민들이 조금 못살게 되더라도 정치의 대원칙인 ‘신뢰’만은 끝까지 지키라는 공자의 말이 더욱 생각나는 것이다. 바로 이 말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깊이 새겼으면 한다. 국민의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는 말을 명심하고 반드시 실천할 때에 그는 틀림없이 우리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가운데 이 나라의 새로운 5년을 이끌어나갈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이준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