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한 다스(dozen)의 무게는 열두 개가 똑같다. 가야금 열두 줄의 무게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나 1년 열두 달의 무게는 모두 다르다. 시각적으로야 28일뿐인 2월이 가장 가벼울 것 같고 31일 달보다는 30일 달이 가벼울 듯도 싶다. 또 온통 앙상하게 가지마다 헐벗은 나무들하며 모든 열매와 곡식을 거둬들여 텅텅 빈 논밭서껀 12월이 가장 가벼울 것도 같고 반대로 한껏 우거진 숲과 곡식 열매로 무성한 8, 9월이 가장 무겁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정적, 심증적(心證的)인 열두 달의 무게는 단연 1월이 가장 무거우리라. 왜 그럴까. 그야 12월까지만 해도 없었던 저마다의 새로운 계획과 각오와 다짐이 1월1일 '땡…땡' 시작과 함께 1월 자락에 쌓이고 새삼스런 무게의 꿈이며 희망들이 이 1월 한 폭에 미어져라 포개지고 엎어지고 어빡자빡 산더미처럼 쌓이기 때문이 아닌가.

1월의 무게란 벅찬 희망의 무게요 꿈의 무게며 계획과 다짐의 무게인 동시에 사색과 철학의 무게다. 이런 1월의 무게 잡힌 벅찬 희망을 가리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눈을 뜨고 꾸는 꿈'이라 했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1월1일 이 찬란한 아침 햇살에도 크게 눈을 뜬 채 영롱하고도 확연한 꿈을 꾸지 못한다면 이제 그만 희망 없는 삶 부스러기들일랑은 모두 거둬 포개 이고 지고 절망의 피안 저쪽으로 떠날 채비를 갖춰야 할지도 모른다.

한데 새해가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시작되는 나라도 있다. 유태인의 달력은 정월 초하루가 9월 중순이다.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 의장은 2001년 9월18일의 신년을 맞는 이스라엘을 배려해 그 전날인 17일 공격 정지 명령을 내렸다. 이슬람력(曆)의 새해는 3월15일경이고 태국의 신년은 세 가지나 된다. 양력과 음력 1월1일 말고도 '손그라인'이라 불리는 타이력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새해는 새해다워야 한다. 새 해 새 다짐과 새 꿈, 새 희망이라면 아무래도 지구촌의 가장 많은 나라가 함께 맞는 양력 1월1일이 제격이다. 싸늘하고도 엄격한 소한 문턱에서 냉엄하기 짝이 없는 온도로 꾸는 엄숙한 꿈이라야 꿈답고 희망답기 때문이다.

2003년 1월1일 이 아침은 어떤가. 마음놓고 벅찬 꿈과 희망을 품어도 좋은 것인가. 영어의 1월 재뉴어리(January), '야누아리'는 로마 신화의 두 얼굴의 신 야누스(Janus)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1월은 희망과 절망, 난망과 유망의 두 얼굴을 갖는다. 그렇다면 2003년 1월1일 이 아침의 우리 땅 우리 겨레가 갖는 야누스의 얼굴은 어느 쪽인가. 안타깝게도 어두운 쪽이고 불안하게도 이지러진 쪽이 아닌가. 그런 얼굴들로 냉엄한 국제 경주 속을 달리는 우리 민족, 우리 겨레를 떠올린다. 기묘하게도 경주를 뜻하는 영어의 레이스(race), 레이싱(racing)은 민족, 인종, 혈통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민족=경주'다. 따라서 냉혹한 민족간 국가간 경주 라인을 벗어날 수 없는 게 지구 별 인간이다.

우리는 지금 몇 번째로 어느 지점을 어떻게 뛰고 있는 것인가. 러시아 땅의 100분의 1, 중국과 미국 땅의 43배와 42배에 불과한 한반도가 그나마 허리가 잘려나간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것도 참을 수가 없는 민족적 부끄러움이거늘 작금의 북쪽 사태는 어찌 해야 하는 것인가. 대∼한민국의 '대(大)'자도 그리 떳떳한 편은 못된다. 우리는 아직도 메이저 국가 군(群)이 아닌 마이너 국가 군에 속해 있고 1군이 아니라 2군에 들어 있다. 더욱 자존심 상하는 건 지난 봄 미국의 어느 유력 잡지가 우리 대한민국을 '어른 국가(adult country)'가 아닌 '아이들 국가'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분통터지게도 우리는 아직도 너무 작고 너무 부족하다. 교육비 지출은 지난해 11월 현재 OECD 국가 중 1위라지만 유엔개발계획이 지난 7월 발표한 인간개발지수는 27위에 불과하고 국가 청렴도는 42위,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른 나라치고는 인지도 역시 아직은 낮은 편이다.

우리의 갈 길은 멀고 험난하고 숨이 턱에 차는 국제 경주 라인에 들어 있다. 무엇보다도 북쪽 문제가 잘 풀려 남인(南人) 북인이 힘을 포개야 하고 모세의 기적처럼 서인(西人) 동인으로 갈라진 민심 역시 봉합돼야 한다. 세대간의 골도 물론이다. 2003년 1월1일 이 아침 7천만이 다 함께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부르는 환상을 그려본다. <오동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