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知人)으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다. 대구에 맛으로 유명한 음식점이 있는데 최근 들어 거의 망하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이다. 호남 사람이 주인인 이 가게는 15대 대선의 고비는 잘 넘겼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지역내 식자층에선 모두 그 가게의 안위를 걱정했으나 별 탈이 없었다고 한다. '김대중'이니까 95% 안팎의 호남 지지율을 이해했다나. 그런데 노무현 당선자에게 호남에서 또 95%급 지지율이 나오자 이번에는 '뭐 이런게 있노'라는 격한 반응이 터져나왔고, 그래서 이심전심 그 가게에 발길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말을 전해준 사람도 전해들은 얘기라 한다. 무릇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유언비어는 이런 식이기 마련이다. '그쪽에선 그런 일이 있었다대' 아니면 '저쪽에선 그런 말이 나돌던데…' 하는 식이다. 문제는 이같은 유언(流言)이 흐르고 비어(蜚語)가 난무하면 대중은 알게 모르게 집단적으로 세뇌 당해 특정한 대상에 대해 오도된 신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TK 사람들은 지난 대선에서 호남 만큼 뭉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면서 절치부심, 다음 선거에서의 단결을 도모하고 있는지 모른다. 대구의 한정식집 이야기는 TK 각성의 상징으로 장치된 '특별한 사실'이거나 '고안된 허구' 둘 중 하나인 셈이다.
새삼스럽게 호남의 투표성향을 복기(復棋)하고 영남권의 좌절(?)을 얘기하자니 매우 조심스럽다. 말 꺼내는 자체가 부담스럽고 심란하다. 그런데 바닥에 깔려있는 지역감정의 양상이 이렇듯 흉흉하니 문제다. 누가 당선되면 이민을 가겠다고 말한 사람들은, 이민은 안가고 여전히 조국의 땅에 감정의 멍울만 키우고 있는 게 현실이다. 도대체 이번 대선을 통해 지역대결 구도가 퇴조했다는 분석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를 일이다. 충청권의 지지율을 그 근거로 삼기에는 허전하다. 지역감정이 단어를 폐기하고, 수준을 격하시킨다고 해서 없어질 문제도 아닌데 모두 애써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말 꺼내기를 주저하고 있는 형국이다.
더 큰 문제는 지역감정이 매우 세련된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반호남 정서의 사람들은 새로운 정권에 대해 '전라도 정권'이라고 말하는 대신 '맹목적인 개혁세력'이라고 한다. 반대로 친호남 인사들은 반호남 세력을 향해 '수구반동'으로 몰아치고 있다. 반미시위의 경우를 보자.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한미관계를 요구하는 젊은 세대의 기운과 이를 걱정하는 기성세대의 우려가 대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무서운 실체를 발견하게 된다. 젊은 세대 속에는 대선에서 승리한 세력과 지역이 들어가 있고, 기성세대에는 그 반대세력과 지역이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앞으로도 새정권이 해결해야 할 북핵문제를 포함한 대북관계 설정 문제나 재벌해체 등 경제개혁 문제 등 각종 주요 국정현안마다 맹목적인 지지나 반대로 국론을 분열시키는 세력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정치권이 이들을 교묘하게 조정하고 이용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상황은 심각하다. 한국사회 갈등 양상의 기저(基底)에는 이렇듯 질기디 질긴 지역감정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국민 모두 지역감정의 피해 당사자가 국민이라는 자발적인 자각이 있어야 한다. 대선 때마다 악감정을 교환하고 화를 삭이는데 시간을 허비하면서 21세기를 맞은 우리다. 감정의 대립으로 탄생시킨 정권은 약할 수밖에 없다. 탄생부터 레임덕에 걸린 정권은 김대중 정권으로 끝마쳐야 한다. 노무현 정권은 두 발로 걸어야만 한다. 그러려면 정당을 통해 이념이 조율되고 정책이 조정되고 갈등이 치유되는 정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지역감정이야말로 우리의 '21세기형 전진'을 가로막는 '20세기적 반동(反動)'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젊은이들은 이같은 각성을 위한 촛불행진을 벌여야 한다. DJ, YS, JP 3김씨는 남은 인생 손잡고 전국의 명산대천을 순례하며 20세기에 이루지 못한 화해를 21세기의 젊은 세대 앞에서 해내야 할 것이다. 호남 사람들은 '95% 지지'에 담긴 맹목을 성찰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호남의 95%가 이번이 끝이겠거니'하고 대범하게 넘기자. 그래야 우리 역사의 시계는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윤인수 (논설위원)>윤인수>
지역감정은 21세기의 반동(反動)
입력 2003-01-07 00:00
지면 아이콘
지면
ⓘ
2003-01-07 0면
-
글자크기 설정
글자크기 설정 시 다른 기사의 본문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가
- 가
- 가
- 가
-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