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좌정(坐定)할 때마다 등뒤로는 어김없이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자막이 보인다. 그런데 그 말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아둔한 머리로는 영 헤아리기 어렵다 못해 고통스럽다. 도대체 '대통령'이면 대통령이고 '국민'이면 국민이지 '대통령이 국민'이라니?
그럼 앞집 아저씨도, 뒷집 아줌마도 대통령이고 4천몇백만 대한민국 국민이 깡그리 대통령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대통령 선거는 거창하게 날 잡아 따로 왜 하고 '대통령 당선자'라는 호칭은 왜 생뚱맞게 숱한 입들에 오르내리는 것인가. 혹여 4천몇백만 국민이 모두 대통령은 대통령이로되 노무현 당선자가 대표 대통령, 수석 대통령, 대통령 중 대통령이란 그런 뜻인가.
그러면 '대대통령' 또는 '대중대통령(大中大統領→대통령 중 대통령)'이라는 호칭쯤이 어떨까. 하기야 대통령 당선자도 국민의 한 사람이니까 뒤집으면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말도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표어는 속된 말로 입술에 침도 안 바른 입에 발린 소리처럼 들린다. 요즘 애들 말로 느끼하고 썰렁하다 못해 닭살 돋는 말이고 멀쩡한 국민을 우롱하고 약을 올리는 말 같기만 하다. 물론 국민이 주인이다, 국민을 받들겠다,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겠다는 비슷한 취지로 지어낸 말인지는 모르지만 노 당선자가 5년차 수련 대통령이자 전문 대통령으로 큰 일을 하기 전에 우선 해야 할 일은 실소를 자아내는 그런 쓸데없는 조어(造語)부터 없애는 게 어떨까. 왜 그래야 하는가. '대통령'이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단 한 번이라도 염두에 두었더라면 그런 표어는 만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란 '크게(大) 통치(統)하고 영도(領)하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대단한 사람이며 그야말로 '대권(大權)'에나 어울릴 엄청난 사람, 어마어마한 사람이다. 중국의 '대총통(大總統)'이나 '총통'이라는 호칭도 비슷한 뜻이다.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서양 문물을 수입하면서 영어 프레지던트(president)를 '大統領'으로 번역, 표기하면서 비롯된 말이 '대통령'이다. 그런데도, 그런 어마어마한 사람이 '대통령'인데도 4천몇백만 국민이 모두 크게 통치하고 다스리는 '대통령'이라고 한다면 말이 되는가.
'대통령=대권'이다. '대권'이 무엇인가. “여 봐라! 저 놈을 당장 끌어내 목을 치렷다”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비롯해 무소불위의 왕조시대 왕들의 권세와 권한이 대권이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권한을 조선시대 사람들은 '건병수(建甁水)'라 일컬었다. '지붕 꼭대기에서 큰 병 속의 물을 내리쏟아 붓는 듯한 위세'라는 뜻이다. 육신의 목만 치지 않을 뿐 오늘날 대통령의 대권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영어로는 '슈프림 파워(supreme power·최고의 힘)' '소브린티(sovereignty·통치권)' '거버닝 파워(governing power)'다. 더 이상은 없는 '막강한 힘(The greatest power)'이 '프레지덴셜 프리로거티브(presidential prerogative)' 즉 대통령의 대권이다.
하지만 '대통령'도 '대권'도 요즘의 시민사회엔 어울리지 않는 말인지도 모른다. 대통령도 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설사 대통령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이치와 사리에 맞고 법리에 맞아떨어져야 먹혀들기 때문이다. 그래선가 정작 '대통령'이라는 말을 만든 일본에선 쓰지 않고 내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도 '당선자+님'이라는 별나고 어색한 호칭과 함께 지레 벌벌 떨고 알아서들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는 까닭은 무엇이며 평범하다 못해 진부함에 가까운 말씀 한 마디까지도 초등학생처럼 받아 적기에 여념이 없는 고위 관료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들은 이렇게 믿고 있을지 모른다. “대통령 책임제 국가의 대통령이란 실제로 그리고 엄연히 3권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는 데다가 국가 통치권서부터 시시콜콜한 사안까지 만기친람(萬機親覽), 무한대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니 까딱 '괘씸죄'에 걸려드는 날이면 나만 손해다.”
그들도 대통령 당선자도 기억해 둘 말이 '조롱국병(操弄國柄)'이다. 막대한 권력을 움켜쥐고 틀어쥔 자가 경솔하게 함부로 정사를 번롱(희롱)했다가는 결코 국민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이라는 호칭도 바꿀 필요가 있다. '대통령'과 '총통'은 물론 의장, 총재, 총장, 학장, 회장, 사장 등 폭넓은 뜻을 가진 영어의 '프레지던트' 같은 적절한 말은 없을까. '시티즌이 프레지던트입니다'라고 해도 그럴싸하게 들리도록 말이다. <오동환 (논설위원)>오동환>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입력 2003-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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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1-2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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