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패망 이후, 분단 44년동안 서독은 동독을 소련의 허수아비로 단정, 철저히 무시하는 정책으로 일관해 왔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1969년 사민당의 브란트가 자민당의 도움으로 집권하면서 돌변했다. 브란트는 서독의 안정과 번영은 공산권과의 우호협력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소련·폴란드·체코 등과 우호조약을 맺고 동독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1970년 3월19일 동독의 에르푸르트에서 첫 총리회담을 열었을때, 빌리 슈토프 동독총리가 즉각 수교와 함께 서독이 동독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며 300억달러의 보상금 지원을 요구하고 두달 뒤 서독의 카셀에서 있은 2차회담서도 억지주장을 되풀이하자 브란트는 에곤 바르 보좌관을 내세워 동독과 비밀협상에 착수하여 수교, 유엔가입 및 상호대표부 교환 등을 골자로 한 기본조약을 완성했다.
1970년대 초부터 통일될 때까지 서독이 동독에게 지원한 것은 대체로 4가지 방법으로 약 62조원에 달한다. 동독에 있는 친척을 만나러 갈 때 안내비 등으로 지불한 입국료, 약 3만4천여명의 동독정치범들을 석방해 인수받으면서 낸 비용, 동독의 기업지원을 위한 차관제공, 그리고 동독의 농산물을 애써 비싸게 수입해서 유럽공동시장에 판매한 것 등이다. 62조원이란 거액이지만 60% 정도가 기업지원을 위한 차관이어서 실제 제공한 것은 30조원 미만이다.
문제는 비밀협상은 물론, 어떠한 지원과 차관도 야당에 모두 알려주고 협의해서 결정을 했다는 점이다. 여야는 소위 동독에 대한 초(超)당파적 정책으로 4가지 원칙을 설정했다. 검은 돈을 주지 않고 뒷거래를 하지 않으며 원칙과 명분이 없는 지원을 금하며 모든 교섭내용을 국민에게 알리기로 한 것이다.
설 직전에 드러난 거액의 대북지원사실로 정치권이 긴장하고 국민들 역시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감사원이 소위 현대 상선의 4천억원 행방 논란을 감사한 결과, 그중 2천235억원(2억달러)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북한에 제공됐다고 밝힌 것이다.
대북거액지원은 의문점과 해괴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산업은행으로부터 갑자기 대출을 받아 지원한 점이다. 정상회담 직후 거액의 대가를 주고 회담을 성사시킨 것 아닌가 라는 국내외의 의문 제기에 청와대 측은 단호히 일축했었다. 둘째, 작년 가을 국정감사에서 4천억원 불법대출과 대북지원설이 제기됐을 때 엄낙용 전 산은총재가 “청와대 고위인사의 전화가 있었다”고 증언했지만 당국은 “관여한 적 없다. 단 1달러도 준 것이 없다”고 했고 현대상선 역시 대북지원을 부인했었다. 셋째, 북한이 우리돈(원貨)을 받을 리 없고, 2억달러라는 거액을 돈 세탁해서 달러로 환전하려면 힘있는 기관이 개입했을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다음으로 현대상선 측은 2천235억원이 개성공단 사업비용이라고 감사원에 소명했으나 남북교류협력법 등에 의거, 대북사업을 관장하는 통일부는 당시 관련 사업계획서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하고, 토지공사 측은 허허벌판인 공단예정지만 보고 거액을 지불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한 점이다.
아무튼 의혹의 핵심은 누구의 지시에 의해, 무슨 대가와 명목으로 대출이 되고, 어떻게 돈세탁과 환전을 거쳐 어디서, 누가, 북한의 누구에게, 언제, 전달했는가 하는 점이며, 왜 하필이면 정상회담 직전에 전달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거액의 대북지원에 대한 갖가지 의문과 의혹 속에 김대중 대통령이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천명은 국민을 크게 당혹시키고 있다. 일부에서 제기한 “통치행위에 대해 문제삼지 말기”를 강조한 것이다.
이것으로 의혹을 모두 덮을 수 있을까?
진정한 통치행위는 합헌성, 도덕성, 국민적 이해를 바탕으로 했을때 참다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통치행위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헌법재판소는 통치행위도 사법심사의 대상이 된다고 해석한 바 있다.
이제 국민의 시선은 노무현 당선자에게 집중되고 있다. 그는 대선이래 최근까지 여러 차례 “대북거액지원 의혹은 철저히 규명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얘기한 바 있다. 김 대통령이 “문제 있는 것은 모두 나에게 넘기고 가라”고 한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쯤 검찰은 독자적으로 이 사건규명에 나섰어야 하는데, 여전히 장고와 눈치보기가 계속되고 있다.
왜 김 대통령과 청와대, 현대상선 측은 모든 것을 성실하게 밝히지 않는 것인가? 혹시나 북한의 감정을 자극할까 우려하는 것일까? 밝히지 못할 진짜 속사정이 있는가?
국민의 의혹이 증폭되고 야당이 철저규명을 다짐하는 가운데, 노 당선자 측은 국회에서 정치적인 해법을 모색해 주었으면 하는 입장으로 선회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렇다면 여야는 특별검사를 선정, 독립적인 수사로 모든 것을 밝히게 하고 미진할 경우 국정조사특위를 가동시켜 활동케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이 문제는 노무현 정부 출범 전에 규명되고 매듭되는 게 바람직하다.
대북 거액지원의 미스테리
입력 2003-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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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2-03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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