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단풍은 이미 아름답게 물들어 국민들에게 보여졌으며 이제 마지막 잎새는 21일이 남았다. 그 마지막 잎새들이 낙엽으로 떨어져 노무현 정부의 밑거름이 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4일 비서실 월례조회에서 한 말이다.

김대중 정부의 업적에 대한 자부(自負)를 느낄 수 있다. 또 역사의 순환을 깨달은 사람의 달관도 엿보여 듣기에 좋다. '국민의 정부'를 표방한 김대중 정부에 헌신한 박지원 실장이기에 가능한 귀거래사다.

국민들은 박 실장의 표현대로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잎새가 아름답게 추락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일의 희망을 잉태하는 숭고한 소멸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5년 임기중 20일만을 남겨놓은 지금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잎새는 '대북송금' 의혹의 광풍을 만나 아름다운 나선형 추락이 힘들게 됐다. 그 잎새가 노무현의 대지 위에 떨어지는 그 순간의 비장함, 숙연함을 공감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지금 정치권에서는 대북송금 의혹 해결을 위한 다양한 방안이 속출하고 있다. 처음에는 검찰수사에 모두 동의한 듯 보였다. 그러다 문희상 새정부 대통령 비서실장 내정자가 정치적 해결을 제안하더니,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국회에서 진상조사 방법을 결정하라고 최종적인 입장을 밝혔다.

야당은 특검제, 국정조사를 들먹이며 이 문제를 대선패배의 고통을 상쇄할 절호의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다.

청와대 입성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며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반면 야당은 분열된 전열의 수습 차원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권이 이렇듯 들썩이자 정작 법질서의 마지막 수호자인 검찰은 수사를 유보하겠다며 강 건너 불보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대북송금 진상규명을 놓고 벌이는 작금의 혼란이 불가피한 것인지 의문이다. 대북송금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는데도 이를 알아내기 위해 정치권이 논쟁을 벌이고 국민적 에너지를 낭비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새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 아닌가.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말해야 한다. 대북송금의 진실을 말해주고 떠나야 옳다. 그 돈이 북측의 누구에게 전달됐고 어떻게 쓰였는지 국민은 알고 싶다고 아우성이다. 공개를 촉구하고 있다.

대북송금 진실 규명은 김 대통령에 대한 지지여부를 전제한 요구가 아니다. 보수나 진보, 민주당 혹은 한나라당에 따라 시각차를 달리할 사안도 아니다.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밝혀져야 할 문제다.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대한 전면적인 성찰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도 반드시 햇볕 속에 드러내야 할 사안이다.
 
만일 이 문제가 국회의 국정조사나 특별검사에 의해 강제로 뚜껑이 열려지는 상황이 온다면 이는 불행이다.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는 사람, 김 대통령이 국회 혹은 국민들을 직접 대면할 수 있는 매체를 통해 직접 해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사과할 일이 있으면 사과해야 한다.

진정 남북관계의 진전을 위해 불가피한 송금이었다면 국민들이 수긍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 이후에 거론될 불법 시비는 퇴임을 앞둔 대통령의 진솔한 고백앞에 무의미해질 수 있다.

통치행위의 부적절한 전형과 그에 따른 시비를 남겨둔 채 퇴임하는 것은 오히려 김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오점을 남기는 일이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통치행위에 대한 사법심사는 부적절하다'는 초법적인 변명을 국민이 외면하고 있는 지금 김 대통령은 명예로운 고백을 해야할 의무가 있다. 김 대통령은 말해야 한다. 자신의 통치행위를 정쟁과 법 적용 시비의 대상으로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국민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행복한 퇴장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의 초라한 귀가(歸家)가 국가에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새정부 출범 전야의 혼란을 일소할 김 대통령의 결단을 기대한다. '국민의 정부' 그 마지막 잎새가 아름답게 추락하기를, 숭고하게 소멸하기를 기원한다.

/윤인수(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