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어느새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섰다. 제주에서부터, 땅끝에서부터 봄소식은 들려온다. 더 이상 갈데가 없어 갈두(葛頭·칡머리)라 했던가.
황톳길 구비구비 따라 더 이상 갈 곳 없는 마지막 땅 해남 땅끝에 서있노라면 그 곳에서 떨어져나온 조각 섬들 사이에 갈매기들이 끼룩대고 일손 바쁜 뱃사람들의 거친 숨소리도 파도에 실려오는 곳이다.
지난 주말 다녀온 땅끝과 시선(詩仙) 윤선도가 거닐던 반도의 파라다이스 보길도에 동백꽃이 활짝 피다 못해 시들어가는 따스한 봄이 성큼 찾아왔다. 예송리 바닷가 하늘 중턱에 걸려 있던 정월 대보름달이 고기잡이 배들과 함께 평화스런 정경을 보여주고 자갈밭 해변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는 가슴 속을 잔잔하게 파고든다.
응달진 계곡에 아직도 쌓여 있는 눈밑으로도 봄의 소리가 들려오고 두껍게 얼었던 강물도 따뜻한 햇살과 훈풍 앞에 맥없이 녹아 춘심(春心)을 실어나르며 유유히 흐른다.
정도전은 '봄은 봄의 출생이며, 여름은 봄의 성장이며, 가을은 봄의 성숙이며, 겨울은 봄의 수장이다'고 했다. 이런 시귀(詩句)가 아니더라도 봄은 모든 사물의 소생을 의미하고 생명의 경이와 신비감을 일깨워주는 환희의 계절이다.
농부들은 씨앗을 뿌릴 준비에 여념이 없다. 남도(南道)에서부터는 화신(花信)이 들려오고 양지바른 곳에도 목련의 꽃망울이 잔뜩 부풀어 있다. 19일은 겨우내 얼어 붙었던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다.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는 봄같지 않은 봄이다. 춘래불사춘이랄까.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오랑캐 땅에는 꽃도 없고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같지 않다)' 당나라 시인 이백은 한나라 원제(元帝)의 명령으로 흉노족에 팔려간 한 아름다운 궁녀의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봄이 분명히 오고 있음에도 봄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웬일일까.
서민층의 마음들은 아직도 한겨울처럼 썰렁하다. 집값과 전셋값·사글세가 치솟고 각종 물가가 천장 높은 줄 모르게 뜀뛰기 경쟁을 하는 데다가 국제정세마저 어지러우니 화사한 봄을 느낄 수가 있겠는가.
새대통령의 취임식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요즘 우리 사회는 너무 어렵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IMF 때보다도 더 혹독한 겨울을 맞고 있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며칠 전 밸런타인 데이에 중학교 3학년인 큰 녀석에게 초콜릿을 몇 개나 받았느냐고 슬쩍 물었다.
한 개도 못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너 사회 생활 잘못한 것 아니냐'고 농담을 건넸다. 녀석 왈, 초콜릿을 가져온 여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국적 불분명한 문화를 거부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예년 같으면 여남은 개는 족히 받아왔을 텐데 이도 아버지들의 호주머니가 빈약해져서는 아닐까 하는 쓸데 없는 생각도 해본다.
게다가 고집불통인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침공을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전 세계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에 휩싸여 있다. 북한의 핵문제는 이미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로 넘겨지고 정치권은 지난해 9월부터 불거져 나온 북한에 지원해준 5억달러 문제를 놓고 국론이 분열되는 등 어수선하다.
대북지원이 사실로 확인된 마당에서 진실을 가리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기는 어렵게 됐다. 국민들은 또 정치보다는 로또복권 광풍에 열을 올리며 한탕주의만 만연되고 있다. 체감경기도 급격히 하락해 소비심리가 몇년새 최저치란다.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은 전쟁위기와 북핵문제 등으로 국가신용등급의 하향전망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 대기업 등이 국민들을 기만하는 것을 바라보노라면 그저 욕밖에 안나온다.
노무현 당선자의 '섀도 캐비닛'도 뚜껑이 거의 열리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기대에 차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최근 발표된 청와대 수석비서진들의 면면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의 언행이나 행보 자체가 불안스럽다는 얘기들도 많이 하고 있다.
국정운영에 있어 고뇌에 찬 결단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진정한 국민들의 목소리가 무엇인지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이 계절의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중요한 요인들이다. 아, 우리들에겐 자연의 축복 속에서 느꼈던 남도(南道)기행에서의 봄이 언제나 오려는가.
〈李俊九·논설위원〉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입력 2003-02-19 00:00
지면 아이콘
지면
ⓘ
2003-02-19 0면
-
글자크기 설정
글자크기 설정 시 다른 기사의 본문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가
- 가
- 가
- 가
-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