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이라크 침공을 개시했다. 사태진전에 따라 국제유가가 폭등하면 국제경제를 침체의 심연으로 빠뜨릴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다 북핵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이 터져 국가신인도가 흔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 잠복해 있는 내채위기(內債危機)가 시한폭탄처럼 위태로운 형국을 하고 있다. 새 정부의 급선무는 가계의 집단파산을 어떻게 막느냐 하는 일이다.

1997년 외환위기는 예견된 일이었다. 은행과 종금사들이 해외에서 돈놀이한다며 국제시장에서 돈을 빌려 이자차익을 따먹고 있었다. 동남아에서 외환위기가 돌림병처럼 번지자 현지에서 대출회수가 불가능해졌다.

일본계 은행들이 만기연장을 거부하면서 외환위기가 발단했다. 도화선에 불이 붙었으나 경제부총리는 경제체질이 튼튼하다는 소리나 되뇌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국가경제가 파탄나고 경제주권을 상실하는 참혹한 사태가 일어났다.

6년 전의 상황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한다. 최근 외환보유고가 23개월만에 감소세를 나타냈으나 3월15일 현재 1천235억달러로 비교적 넉넉한 편이다. 외환위기와 같은 극한상황을 상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채위기를 우려할만큼 눈덩이처럼 불어난 가계부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중첩한 불안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 의외의 사태로 발전할 수 있는 국면이다. 이라크 전쟁의 장기화로 외국인 투자가 빠져 나간다면 금리와 환율을 자극한다. 이 경우 금융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하면 가계부채의 뇌관을 건드릴 수 있다.

작년말 현재 가계부채는 439조원으로 1년새 30% 가까이 증가했다. 1999년 12월말의 214조2천억원에 비해서는 2배 이상 늘어난 규모이다. 이런 추세로 나가면 금년말에는 500조원을 넘을 듯하다. 가계부채의 급증세를 타고 신용불량자가 양산됐다.

지난 2월말 현재 284만명으로 사상 최대의 규모이다. 여기에다 규모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사채가 도사리고 있다. 전세금도 따지고 보면 집주인이 갚아야 할 빚인데 그 규모도 100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값이 떨어지면 그중 상당액은 집주인이 물어내야 할 돈이다.

연간 이자부담만도 40조원이 넘는다. 가구당 부채가 2천906만원으로 3천만원에 육박한다. 2000년 가계대출잔액이 가처분소득의 79.0%였으니 작년에는 그 비율이 100%를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빚이 번 돈보다 더 많다는 뜻이다.

금융계에서는 대출 받은 사람 10명중에 6명은 대출금이 연간소득보다 2.5배나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 빚내서 빚갚는 채무차환(債務借換)단계에 이른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또 GDP에 대한 비율도 2000년 51.1%에서 작년 6월에는 70.6%로 높아졌다. 상환능력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절반이 넘는 가계대출이 주택구입자금이라는 점도 심각한 문제다.
2002년 1/4분기에는 그 비율이 56.1%로 급증세를 나타냈다. 담보대출총액이 작년6월말 현재 110조원을 상회한다. 집을 담보로 빚을 내서 아파트를 산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가 오르고 집값이 떨어지면 담보가액이 모자라는 사태가 일어난다. 최악의 경우 가계가 집단파산하고 은행의 채권이 집단부실화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신용카드사들이 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며 소득유무를 가리지 않고 카드를 남발했다. 그 결과 연체파동이 일어나 카드사의 숨통을 죄고 있다. 연체율이 높아지자 연체대금을 대출로 바꾸어주는 대환형식으로 부도를 막아주고 잇다.

그런데 문제는 연체자들이 이 카드, 저 카드로 돌려가며 빚을 땜질했기 때문에 카드사들이 동반도산의 위기에 몰렸다는 것이다. 카드사들이 자금조달을 위해 발행한 회사채와 기업어음이 46조원에 달한다. 그런데 SK글로벌분식회계사건이 금융시장을 강타하면서 신규발행도 만기연장도 중단상태다. 카드사가 금융위기의 진앙지로 떠오르고 있는 모습이다.

금리가 1%만 올라도 가계부담이 연간 4조원 이상 늘어나고 연체가 증가한다. 이미 과중한 이자부담과 대출억제로 소비위축이 일어나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 경기침체를 가속화시키면 부도사태-실업양산으로 이어져 금융위기를 촉발할 우려가 있다.

가계부채가 이미 경고음을 울렸다. 새 정부는 늦기 전에 위험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내채위기를 극복하자면 모든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 말고는 뚜렷한 정책수단이 없다. 이 점에서 국민적 이해도 중요하다.
/김영호(시사평론가)